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의 불행을 안고 있다”라고 썼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라는 것은 알지만, 모두가 인용하되 읽지는 않는 책이라는 고전(古典)의 정의에 맞게 소설은 읽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관찰이 꼭 들어맞는다는 건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주변의 불행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스트레스 해소 방식이 제각기 다르단 걸 두루 확인해서다. 폭음, 줄담배, 고강도 스포츠는 물론 뉴스에 악플 달기 같은 다양한 각자의 방식이 있으나, 나는 주로 머리를 비우고 볼 수 있는 옛 코미디 영화를 본다. 가장 좋아하는 게 ‘무서운 영화’라는 패러디 영화 시리즈인데, 요즘은 이런 장르 자체가 사라져 아쉬움이 크다.
패러디(parody) 장르가 사라진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패러디는 기본적으로 반(反)문화다. 모두가 보편적으로 알고, 익숙하게 느끼는 서사나 상황을 뒤집는 전복적인 쾌감이 장르의 중추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보편적인 콘텐츠가 성립되어야만 하는데, 미디어 환경이 파편화된 탓에 더는 대중문화라고 할 법한 것들이 존재하지 않게 됐다. 2003년 방영된 드라마 ‘대장금’은 최고 시청률 57.8%를 기록했지만, 한국갤럽 정례 조사 ‘한국인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에서 2024년 연말 상위권을 기록한 드라마 ‘정년이’는 18.8%에 그쳤다. 같은 공간에 거주하는 가족도 각자가 여유 시간에 뭘 보는지 모르는 시대가 됐다.
거시적 미디어 환경 변화에 더해 좀 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패러디 영화가 추구하는 공격적인 형태의 유머가 통용되기 어려울 정도로 문화 엄숙주의적 태도가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가령 희화적 재현의 귀재인 코미디언 이수지씨가 ‘강남맘’의 극성스러움을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한 걸 두고, 일각에선 이를 여성 혐오라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정치적 올바름(PC) 담론은 ‘약자를 웃음거리로 삼지 말자’라는 반성에서 출발했으나, 한국에선 자기 치부를 가리는 방탄막으로 쓰이는 식이다. 이러니 패러디라는 장르 자체가 질식할 수밖에 없다. 이러다간 패러디도 무형문화재로 보호받는 전통문화가 되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