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조선디자인랩 정다운

올해 극장가에서 가장 흥행한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할리우드 연출작 ‘미키17’(301만)이었다. 한국 영화 중 최고 흥행작은 254만 관객을 동원한 ‘히트맨2’. 코로나 이후에도 매년 천만 영화가 두 편씩 나오며 시장을 이끌었던 반면, 올해는 대형 히트작의 부재로 1분기 극장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33.6% 감소했다. CJ 엔터테인먼트 대표를 지냈고, 최근 출간한 책 ‘천만 코드’에서 천만 영화의 비결을 분석한 길종철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에게 극장가에 천만 영화가 사라진 이유를 들어봤다.

길 교수는 현재 한국 영화의 위기는 “스토리의 위기”라고 진단했다. 감독의 미학이나 철학을 중시하는 예술 영화도 있지만, 300만 이상의 흥행이 목적이라면 스토리텔링에 집중해야 하는데 한국 영화가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길 교수는 “코로나 직후 개봉해 실패한 대작들은 코로나 직전 호황기에 투자를 받은 영화”라고 했다. “2019년 총 관객 2억2600만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큰 성공을 거둔 감독들이 나왔고 투자를 받기도 쉬워졌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에 충실하기보다 감독의 욕심이나 숙원을 자유롭게 실현한 영화가 만들어졌고, 하필 코로나 직후에 개봉하게 됐다. 대표적으로 ‘외계+인’이나 ‘더 문’ 같은 영화가 관객을 극장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래픽=김성규

2003년 국내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실미도’를 시작으로, 22년 동안 천만 영화는 총 33편 나왔다. 코로나 이후에도 볼 만한 영화라는 입소문이 나면 관객은 꾸준히 극장을 찾았다. 2022년 ‘범죄도시2’가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극장의 부활을 알렸고, 2023년 ‘범죄도시3’ ‘서울의 봄’, 2024년 ‘파묘’ ‘범죄도시4’가 천만 고지를 넘었다.

길 교수가 분석한 천만 영화의 핵심 비결은 감정 이입할 수 있고 응원할 수 있는 주인공. ‘범죄도시’ 시리즈를 예로 들며 “속편 세 편이 모두 천만 영화에 등극한 건 우락부락해 보이지만 인간적이고, 덩치와 달리 귀엽기까지 한 주인공 마석도 때문”이라고 했다. ‘파묘’도 악귀를 쫓는 한 팀이 주인공으로 이들에게 이입해 미스터리를 쫓는 이야기다. 길 교수는 “주인공은 관객과 영화를 연결하는 통로이자 관객을 이끌고 긴 여정을 떠나는 가이드인데, 생각보다 그 책무를 다하지 않는 주인공이 많다”고 했다.

제작 측면에선 ‘광해’(2012)의 사례를 주목해 볼 만하다. 길 교수는 당시 CJ 엔터테인먼트 국내사업 대표로 투자를 결정하고 제작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2009년 대학생 인턴이 낸 두 쪽 분량 기획안이 영화 ‘광해’의 출발점이었다. 원안에는 ‘조선시대판 왕자와 거지’라는 콘셉트가 적혀 있었다. 이후 시나리오 작가가 합류하고 추창민 감독이 각색과 연출을 맡아 3년 반 만에 개봉하게 됐다. 길 교수는 “어느 산업이든지 젊은 층의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당시엔 콘텐츠개발팀 직원들이 인턴과 함께 아이디어를 개발해나갔다. 영화 한 편이 개봉하기까지 수많은 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처음 기획대로 완성되기가 굉장히 어려운데, ‘광해’는 원안부터 기획·개발·제작·마케팅까지 잘 맞아떨어진 사례였다”고 했다.

길종철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프런트페이지

시장의 다양성을 위해서는 천만 영화 한 편보다 백만 영화 여러 편이 나오는 시장이 더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다. ‘천만 영화’를 노리는 대작에 자본이 쏠리고, 안전한 캐스팅·검증된 공식에 의존해 한국 영화를 질적으로 후퇴시켰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길 교수는 “투자가 일어나야 다양성도 생긴다”고 했다. “천만 영화가 꾸준히 나와줘야 투자자가 시장을 떠나지 않고, 낙수 효과로 예술 영화나 저예산 영화도 지원받을 수 있다. 영화 산업이 주목을 받기 위해선 여전히 천만 영화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