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저녁 독일 라이프치히 오페라극장에서 ‘마탄의 사수’를 보고 나왔다. 극장 기념사진을 찍으려는데 ‘마탄의 사수’ 현수막이 내려오고 다음 날 공연할 발레 ‘달의 공주’ 현수막이 올라갔다. 이날 ‘마탄의 사수’를 지휘한 양유라가 일주일 전 초연한 작품이다.
서른다섯, 마에스트라는 작년 9월 33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이 극장 수석지휘자(제1카펠마이스터)로 발탁됐다. 구스타프 말러, 리카르도 샤이 같은 거장(巨匠)이 거쳐간 이 유서 깊은 극장의 오페라, 발레를 총괄하는 지휘자다.
양유라는 민트색 헬멧을 쓴 채 자전거를 끌고 나타났다. “공연이 끝나면 집까지 자전거로 퇴근한다”고 했다. 오케스트라 단원이나 관객 중에도 오페라가 끝난 뒤 자전거로 돌아가는 이가 꽤 많이 보였다.
◇독일인이 가장 사랑하는 ‘마탄의 사수’ 지휘
칼 마리아 폰 베버가 작곡한 ‘마탄의 사수’는 독일인이 가장 사랑하는 최고의 로맨틱 오페라다.양유라는 올 시즌 공연 4번 모두 지휘봉을 잡았다. “갓 부임한 저에게 독일 낭만 오페라의 걸작을 믿고 맡겨준 극장에 감사하죠. 게다가 처음 지휘하는 작품이거든요.”
단발머리에 검은 색 점프수트를 입은 양유라는 2시간 45분 내내 열정적으로 지휘봉을 휘둘렀다. 오케스트라를 리드하며 성악가들과 합창단에 사인을 주느라 쉴 틈이 없었다. 찬송가 선율로 익숙한 서곡부터 피날레 합창까지 시간이 언제 흘렀는지 모를 만큼 음악에 몰입하게 했다.
◇올 시즌 ‘마술피리’ 등 오페라 5편, 발레 초연만 3편 지휘
라이프치히 오페라 연주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맡는다. 멘델스존부터 푸르트벵글러, 브루너 발터, 쿠르트 마주어, 리카르도 샤이 같은 거장이 거쳐간 독일 최고의 악단이다.미 동부 명문(名門) 보스턴 심포니 지휘자를 겸한 안드리스 넬손스가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양유라는 “뛰어난 오케스트라는 사전 준비가 철저히 돼있다. 살짝 지휘봉만 움직여도 기막히게 반응한다. 함께 연주하다 보면 회오리바람에 휩싸이듯 음악의 절정에 다다른다. 일할 맛 난다”고 했다.
양유라는 올 시즌 살인적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마탄의 사수’ ‘마술피리’ ‘라 트라비아타’ ‘헨젤과 그레텔’ ‘운디네’ 같은 오페라는 물론 발레 시즌 초연작 ‘숄츠 심포니’ ‘휴먼스’ ‘달의 공주’ ‘블랙박스’를 공연했거나 앞두고 있다. 10개월간 오페라, 발레 10편을 40여 회 소화하는 일정이다. “지난 2월 말 처음으로 금, 토, 일 연속 다른 작품을 해봤네요. 발레 ‘휴먼스’, ‘마탄의 사수’ ‘라 트라비아타’ 순으로...”
◇별명은 ‘포스트잇 걸’
스트레스에 시달릴 법하다.그런데 악보 읽고 지휘할 때가 가장 신난다고 했다. 라이프치히 오페라는 매일같이 작품이 바뀌는 레퍼토리 극장이다. 재공연작은 리허설 없이 바로 공연에 투입된다.
“‘마탄의 사수’는 제가 처음 하는 작품이라 그랬는지 리허설에 딱 3시간 주더라고요. 지휘자가 얘기할 시간은 10분도 안 돼요. 요구 사항을 적은 포스트잇을 악보에 잔뜩 붙여서 들어갔어요. 그래서 별명이 ‘포스트잇 걸’이에요, 하하.” 그는 “단원이나 성악가들 기분 맞춰주며 에둘러 얘기할 여유도 없다. 직접 분명하게 요구한다”고 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데뷔
양유라는 올여름 최고 클래식 축제로 꼽히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오페라 지휘로 데뷔한다. 독일 작곡가 제바스티안 쉬밥의 신작(新作)이다.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를 재해석한 작품으로 1시간짜리 청소년 오페라다.
베를린, 뮌헨, 런던 오페라극장에서 활약한 유명 연출가 다비드 뵈시가 대본과 연출을 맡는다. 7월 25일 첫 공연을 포함,12번을 지휘한다. 빈 국립오페라와 공동으로 제작하기 때문에 내년 시즌 빈 지휘를 제안받기도 했다. 양유라는 “청소년 오페라에 관심이 많아 여름을 기꺼이 바치기로 했다”고 말했다.
◇열여덟 살에 독일행 비행기 올라
양유라는 우리 음악계에 미지의 인물이다. 국내 예고나 음대를 나오지 않았다. 천안에서 초·중·고를 나온 평범한 소녀였다. 서너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지만 취미 수준이었다. 고2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방황하던 때였다. 어느 날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을 듣다가 “지휘자가 되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딱 1년만 독일에서 공부하게 해달라. 아니다 싶으면 돌아오겠다.” 2008년 열여덟 당찬 소녀는 부모님을 설득해 독일행 비행기를 탔다. 이듬해 테트몰트대 음대에 들어갔다. 대학 졸업반이던 2012년 에센 근처 소도시 겔젠키르헨 극장에 피아니스트 겸 보조 지휘자로 취직했다.
2018년 킬, 2019년 아헨, 2020~2024년 칼스루에서 극장 지휘자로 일하면서 바닥부터 배웠다. 성악가들의 연습 파트너부터 단역 출연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다. 양유라는 “크리스티안 텔레만이 겔젠키르헨에서 저와 같은 자리로 시작했고, 유명해지기 전 카라얀도 아헨극장 지휘자로 있었다. 독일은 극장에서 모든 것을 배우는 시스템”이라고 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이상형
독일 명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를 이상적 지휘자로 꼽았다.“그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면 신비한 분위기에 휩싸여 음악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한 시즌에 서너 번씩 오케스트라 심포니 지휘도 하고 있다. 지난달엔 본의 베토벤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교향곡 4번을 지휘했다. “서울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에 가본 적도 없다”고 했지만 “기회만 생기면 한국에서 지휘자로 서보고 싶다”고 했다. 2년 전 결혼한 독일인 남편과의 사이에 난 9개월짜리 딸 유민을 키우고 있다. 양유라는 “극장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집에 가서 아이 얼굴만 보면 세상에 더 소중한 일이 있나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