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56회를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 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서울 종로구 운니동 ‘송죽헌’에서 월례 독회를 열고 최근 출간된 소설을 검토했습니다. 4월 독회 추천작은 백수린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문학과지성사)과 안윤 소설집 ‘모린’(문학동네)입니다.

/작가정신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문학동네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명교·문학평론가

정명교 문학평론가

♦봄밤의 모든 것

공감을 넘어 이해로

백수린의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은 제목에서 ‘봄밤’을 붙여 쓰고 있다. ‘띄어쓰기’에 관한 한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게 교육부 표기법이라서 이게 규정에 맞는 표기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붙여 쓴 모양을 가만히 소리 내어 읽어 보니 그 어감이 소설 전체를 대변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소설들은 모두 ‘기후’에 관한 소설이고 무엇보다도 따뜻한 기후에 관한 소설처럼 보인다. 따뜻한 기후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사람들의 이런저런 사연을 수필처럼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는 이 글들 사이에 온화한 공기를 불어넣으려고 애쓰는 화자의 어조가 잔잔히 부각된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타인이 느꼈던 방식 그대로 세상을 느껴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얼마나 헛된가.”(p.70)라는 생각에 단도직입적으로 표출된 공감의 근본적인 불가능성에 대한 탄식이 있다. 이 느낌의 불가능성에 대해 이해의 가능성을 대입시키는 게 이 소설들의 기본적인 골격이다. 흥미롭게도 소설 속에서 풍기는 온화함은 감정적이라기보다 썩 이성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 따뜻함은 찬 기운을 덥히는 것이라기보다는 무언가 격렬한 것을 가라앉히는 기능을 갖는다.

이 점이 백수린의 소설을 이채롭게 만든다. 한국 문학은 대체로 상호 이해의 불가능성을 공감의 심리학으로 토닥이는 일에 주력해왔다. 그런 태도의 바탕에는 한국인이라는 하나의 단위가 육친적 동일성을 형성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런데 그것의 타당성 여부를 살피는 작업은 소홀히 건너뜀을 당하기 일쑤였다.

공감은 아주 소중한 덕목이다. 그러나 그건 ‘이루어야 할 것’이지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공감에 대한 이 두 가지 자세는 아주 큰 차이를 만든다. 가령,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마지막 대목은 ‘동이’가 왼손잡이인 걸 ‘허생원’이 알아차리는 장면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동이’와 ‘허생원’ 사이에 모종의 연결이 있으며, 그것이 소설 너머에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짐작하게끔 한다. 한국 독자들에게 그런 설정은 마음을 썩 설레게 한다. 그러나 서양의 독자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설정이다. “발가락이 닮았다”와 같은 유추 방식인 것이다. 또한 20세기 후반기까지만 해도 미당의 최고의 시로 서슴없이 꼽히곤 했던 「국화 옆에서」의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도 마찬가지다.

‘이루어져야 할’ 공감은 그 앞에 여러 차례의 사전 수행의 절차를 전제한다. ‘이해’는 그 사전 수행 절차 중의 중요한 요소이다. 물론 그것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백수린의 소설은 한국 소설의 무의식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되짚으면서 새로운 전환을 꾀하게 하는 시발점으로 작용하기에 충분하다.

♦모린

감각 혹은 다른 생의 관문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Johan J. Huizinga)는 『중세의 가을』(1919), 첫머리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장식하고 있다.

“세상이 지금보다 5백 년 더 젊었을 때, 모든 사건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선명한 윤곽을 갖고 있었다. 즐거움과 슬픔, 행운과 불행, 이런 것들의 상호간 거리는 우리 현대인들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먼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경험은 어린아이의 마음에 새겨지는 슬픔과 즐거움처럼 직접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성격을 띠었다. 모든 사건과 모든 행위는 특정한 표현을 가진 형식으로 정의되었고 엄격하고 변함없는 생활양식을 엄숙하게 준수했다.” (이종인역, 연암서가, 2018, p.37)

영역본(Penguin Books, 1987)에서는 「생의 격렬성The Violent Tenor of Life 」이라고 번역하고, 불역본(Payot, 1919)에서는 「삶의 매운맛L’âpre saveur de la vie」이라고 번역한 첫 장의 첫 대목이다.

갑자기 이 대목이 상기된 까닭은 오늘날 사람들의 심리가 점점 더 이와 유사하게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라는 느낌 때문이다. 다시 말해 21세기의 현대인들은 ‘조울(躁鬱)의 양극’을 격렬하게 왕복하면서 그 중간 단계는 텅 비어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필자만의 느낌은 아닌 듯하다. 만능 지식인이었던 움베르토 에코도 「포스트 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조형준 옮김, 새물결, 1993)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 속에서 현대와 중세를 유비시키고 있다. 그가 특히 주목한 두 세기의 공통점은 인간의 삶이 안정된 토대를 상실하고 ‘불안감Insecuritas’ 속에서 부유한다는 것이다. 이런 불안감에 대해 에코는 ‘종말론’이라는 애매한 틀을 도입하여 설명하는데, 중세와 21세기가 모두 새로운 변화를 향한 ‘특이점’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시기라는 점이 핵심일 것이다. 왜냐하면 중세의 경우는 신정사회에서 인간중심사회로, 21세기는 인류세로부터 인공지능의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대규모 변동을 한갓 개체가 오롯이 감당하기는 어렵다. 이로부터 당대를 사는 개인들의 불안은 삶에 대한 비관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우울한 감정을 일상의 기분처럼 지니고 산다. 특히 앞날이 불투명한 채로 사회에 입문한 젊은 세대에게 그런 나날의 기분은 자신들의 운명을 덮치는 장막처럼 여겨지게 된다. 이것이 ‘조울의 양극성 긴장’으로부터 그들을 ‘울’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지게 하는 요인이다.

프랑스의 일간지 『르 몽드』, 3월 16일 자 판에 앙토넹 그라티앙Antonin Gratien은 「사랑을 죽이는 질병La maladie ce tue-l’amour」이라는 기사에서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성생활의 불모성을 유발하는 현대적 삶의 풍경을 “조기(弔旗)를 단 리비도”(아마 우리말에서라면, ‘고개 숙인 리비도’라고 해도 좋으리라)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풍경 속에서 “삶은 기쁨의 벡터가 아니라 고통, 불안 그리고 환멸의 벡터”로서 작용한다.

이런 삶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 안윤의 『모린』은 비슷한 정황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정반대로 나아간다. 독자는 첫 대목에서부터 이 소설들이 매우 암울한 인생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매번 확인한다. 가령 표제작인 「모린」은 대뜸 ‘모린’이라는 어휘가 요제프 코발스키(Józef Kowalski, 1928~1984)의 ‘회상록’(?), 『보이지 않는 것들Invisible Things』에 나온다고 밝힌다. 외국어 원명을 작가와 작품 모두에서 적고, 작가의 생사일까지 밝혀서 마치 실존 인물인 듯이 착각하게끔 하는데, 실제, 이 인물은 구글링을 아무리 해도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동명이인 두 사람을 ‘위키피디아’ 영어판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한 사람의 요제프 코발스키(1911~1942)는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당한 폴란드 신부이고 다른 한 사람(1900~2013)은 무려 113년을 산 전직 폴란드 군인이다. 작품 속의 요제프 코발스키는 이 두 실존 인물을 섞어서 만든 가공 인물로 짐작된다. 즉 신부 코발스키를 통해서 오늘날의 삶이 캠프에 갇혀 죽어가는 수인의 그것과 다름없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또 하나의 코발스키는 이런 삶의 끈질김, 다시 말해, 죽음과도 같은 상태가 ‘생’으로 현현되는 긴 과정을 암시한다.

과연 안윤의 소설들은 두 성층으로 이루어진다. 하나의 성층에서는 음울하고 습한 안개가 자욱이 깔린 비전 없는 세상이며, 그 밑의 성층은 그 안개 안에서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어떤 생의 기척들이다. 그것들이 “수만 번 부딪치고 부서져도 결단코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고, 주인물은 그것들을 “오래오래 바라보았”(p.116)(음을 상기한다. 그리고 이후부터 “시간은 겨울을 견디고 기어이 봄으로 나아갔다”(p.116)는 깨달음을 얻어낸다.

바로 그것이 코발스키가 썼다고 제시된 “보이지 않는 것들”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는 용어는 그 살아남는 생의 형식까지도 암시한다. 작가가 지펴내는 새로운 삶의 형식은 현실의 표면에서 드러나는 생에 대한 법률적 규정, 상식적 의미가 아니라 잘 인지되지 않으나 분명히 꼬물거리고 있는 미세 감각들이다. 이를테면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파탄 나는 사랑이 아니라, 섬세한 눈길과 손실로 지속되는 육체적 감각들이다.

그러니까 안윤이 창조하는 새로운 생의 공간은 효용성이 제거된 순수한 느낌의 세계이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사랑에서 패퇴한 사람들이 다른 체제와 다른 형식의 사랑을 꾀하면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두 개의 성층은 각각 별도의 자율성을 갖는다. 이 둘은 충돌하지도 교섭하지도 않는 것일까? 그러면 이 두 개의 삶의 공존은 무엇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일까?

기왕 하위징하를 인용하면서 시작했으니, 그의 글을 다시 옮겨보고자 한다.

“여성은 불결한 환경과 악취 속에서 아이를 잉태하고 슬픔과 공포 속에서 분만하며, 불안과 힘겨운 노동을 통해 키운다. 또한 한순간도 쉴 틈이 없이 공포 속에서 걱정하며 지킨다. [그러나] 그게 비록 한순간의 열락이었을 뿐일지라도 어떤 눈길 또는 소리, 또는 어떤 촉감이 그를 도발하지 않았다면, 누가 그 날들을 거쳐왔겠는가? / […] 죽음을 생각하라는 경건한 설교와 청춘을 한껏 즐기라는 세속적 설교가 거의 혼동될 정도로 뒤섞이곤 했다는 걸 주목해야 할 것이다.”(번역본마다 내용이 너무나 다르다.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처지에서 불역본을 취해 필자 나름의 번역을 소개한다. p.144)

안윤의 소설과 이 문장 사이에 어떤 유비를 볼 수 있을까? 그건 인용 직전의 마지막 질문과 동일한 것이다.

덧붙여 소설적 구성의 차원에서 특기할 만한 점을 적어둔다. 형식의 차원에서 최근 소설의 새로운 경향이 있다면 지금까지 단편소설의 절대적 지침처럼 여겨지던 ‘반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꼼꼼히 살펴보면 반전이 없는 경우와 반전의 형태가 달라진 경우가 있다. 첫 번째 경우는 본문이 특별히 야릇하거나 엽기적인 사건의 연속인 상태가 반전을 대신할 때가 많다. 두 번째 경우는 지금까지 통상적으로 나타난 반전의 형식과 다른 현상을 보여준다. 통상적인 반전은 ‘숨은 비밀이나 원리’에 근거한다. 가령 「맥베스」에서 ‘맥베스’를 쓰러뜨릴 인물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지 않은 자’라는 예언이 있었는데, 그를 실제로 처치한 ‘맥더프’가 ‘제왕절개’ 수술로 세상에 나온 사람이었다는 식이다(쉬운 설명을 위해서 끌어온 것이나, 실제로 좋은 반전은 생의 아이러니에 직면케 하는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반면 안윤의 소설에서 보이는 반전은 나날의 반발이 티끌처럼 모여 서서히 반전의 기운을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이를 ‘태산 형성식 반전’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 반전은 결코 태산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최저 수준에서 티끌들이 먼지바람을 일으키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이런 반전은 “양적 팽창이 질적 변화를 유발한다”는 변증법의 내재적 원리를 상기시키는데, 그것은 ‘전복의 자료가 내부에 있다’고 가정할 때 가능한 판단이다. 즉 일상적 차원에서 끊임없이 ‘반-현실’의 자원들이 출몰했다 사라졌다는 반복하는 가운데 서서히 전복의 기운이 모이는 것이다. 이런 형식의 전개가 21세기 단편소설의 일반성으로 자리할 것인가? 이론과 실제 양면에서 탐구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구효서·소설가

소설가 구효서

♦모린

심사평의 서두로서 이런 언급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으나, 눈물이 나려 했다는 것이 《모린》을 읽은 첫 감상이었다. 굳이 첫 감상이었다고 말하는 까닭은 머지않아 첫 감상에 대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연 나오려던 그것이 눈물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이후의 감상은 눈물보다는 벅참 쪽에 가까워졌다. 넘칠 듯이 가득 차올랐다는 말인데 가득 차오른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어쨌거나 가득 차올랐다는 느낌은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감정이었다. 근래에 소설들을 읽으면서 내내 채워지지 않는, 흔히 말하는 2% 부족 사태가 어떤 증상처럼 내 안에 떠돌고 있었는데 안윤의 소설을 읽는 동안 시나브로 그러한 현상이 사라져 뭉클해지고 말았다.

부족 사태를 느꼈거나 뭉클해졌던 것 모두 나 개인의 성향이나 취향의 문제일 테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안윤의 소설들이 특정 개인이나 소수의 성향만을 충족하는 작품일까 되묻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가득 차오른 그것이 무엇인지가 더욱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조심스럽긴 했지만 소설집 《모린》에 실린 마지막 작품까지 다 읽고 난 뒤에야 혹시 내 안에 가득 차올랐던 그것이 ‘공백’이 아닐까 짐작하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텅 빈 것’ 혹은 ‘아닌 것들’ 혹은 ‘있지 않음’.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욕망의 항아리라고 한다면 그것을 오롯이 가득 채울 것은 공백밖에 없지 않을까. 내 안에 차올랐던 그 ‘텅 빈 것’으로서의 벅참은 안윤 소설을 가득 채운 ‘있지 않음’의 존재론으로부터 기인했음은 물론이다.

‘있지 않음’의 세계에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구분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눈이 있다고 해도 보지 못하거나 눈이 없다고 해도 보게 될 수 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르는 관성이 끊어(26쪽)’지는 것이다. 안윤은 이처럼 시각장애인인 영은을 등장시키거나 금강경의 구절을 인용해 있음과 없음,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금강경 용어로는 상相)를 허물어 벅찬 우주와도 같은 공백을 만들어낸다(<모린>).

그러하니 그 우주는 이러한 것이거나 그러한 것으로 ‘고정되기를 거부한다/끊임없이 떨며/끊임없이 떨리며/(……)이동을 쫓는다(<핀홀> 89쪽).’ 우주든 사랑이든, 그러한 것이라고 고정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그러한 것이 아니게 된다.

<담담>의 ‘나’가 어째서 바이섹슈얼인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동성인 수윤과의 사랑과 이별, 이성인 은석과의 만남, 그리고 수윤의 사망에 따른 비통함을 두고 뭐라 이름 할 수 있겠는가.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가해한 일들에 관해서 단 한 번도 적확한 표현을 찾은 적이 없었다. 과연 그런 게 있기나 한 걸까. 대체 불가능하고 적확한 단 하나의 무엇이(95쪽)’.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한 것은 ‘있지 않다’. 지난 해 동인문학상 수상자인 김기태의 단편 <팍스 아토미카>에서 ‘결정적 주문’ 혹은 ‘하나의 문장’이라고도 했던 그것. 그러한 것은 있지 않거나, 있다고 하여도 입 밖으로 표현하는 순간 이미 그것이 아니게 되거나, 굳이 말로 하자면 표현 아닌 표현으로서의 “뜰 앞의 잣나무(<조주록>)”거나 “나는 문을 닫았다(<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280쪽)”와 같은 선답禪答 정도.

그러기에 왕가위의 많은 영화에서도 줄곧 그러듯이, 안윤의 소설들에서도 필연 또한 있지 않으며, 따라서 사랑들은 이루어지지 않기에, 그 이루어지지 않음이 외려 필연이라면 필연처럼 보인다(<작은 눈덩이 하나>). 죽음밖에는 출구가 없어 보이는, 그 동의할 수 없는 삶을 ‘또, 왜(177쪽)’ 살아야 하는지, 이유도 명분조차도 ‘있지 않은’ 세계로서의 현실이 <또>라는 절창의 단편소설에 하릴없이 녹아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현실적 삶은 암담하고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안윤의 소설은 암담이라든지 비관이라고 섣부르게 가르는 언어적 관성마저 끊는다. ‘(하지가 지나) 낮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 나는 안다. 때가 되면 다시 점점 길어지리라는 것을. 어김없지만 전과는 같지 않을 날이(<하지> 214쪽).’ 이처럼 매일매일이 같은 날들로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앎으로써 ‘세계를 가르는 관성’ 따위로부터 벗어나고 암담이나 비관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위의 작품 <하지>에서 ‘나’는 ‘글렌 굴드와 백건우, 시모어 번스타인의 연주를 듣는다. 수없이 반복해 듣는데도 결코 되풀이가 아니다. 들을 때마다 다르다(212쪽)’라고 한 뒤에 다음과 같이 잇는다. ‘곡을 잘 알게 되어 다르게 들리는 것도 맞았지만, 음악을 듣는 내가 매일 똑같지 않아서 음악도 다르게 들리는 거라는, 너무도 당연한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212쪽)’. ‘매일 똑같지 않은 나’와 ‘전과는 같지 않은 날’을 병치하면서 ‘고정’과 ‘관성’에 갇히지 않는 생성의 원리를 시사한다. 존재와 시간을 상호변수로서 위치시키려 했던 하이데거나,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건 이미 그러한 도가 아니라고 했던 노자, 혹은 차이와 반복의 들뢰즈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와 같은 문장들이 안윤의 소설 안에서는 피부에 닿듯 알뜰히 읽힌다. 이를테면,

‘매일 여기 와.

매일?

응. 같은 시간에 사진을 찍어.

똑같은 풍경을?

똑같은데 안 똑같아(<틈> 243쪽).’

이런 문장들이다.

그러니 암담도 비관도 우리가 알던 의미와 똑같은데 똑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암담의 니힐로nihilo가 희망의 엑스 니힐로ex nihilo와 다르면서도 같은 지점인 것처럼. <틈>에서 소개되는 킨츠기金継ぎ란 무엇인가. 깨진 도자기 조각을 옻칠로 이어 붙이고, 이어 붙인 선을 따라 금가루나 은가루로 아름답게 장식하는 공예다. 그리하여 ‘그 균열들이 더는 자신을 상처 내지 않는다(237쪽).’ 그리고 마침내 <하지>에서 이런 문장이 심상하게 지나간다. ‘난 그래서 인간이 좀 서글프고 아름다운 거 같아(210쪽).’

이쯤 되면 《모린》을 읽고 벅차올랐던 것이 눈물이었대도 상관없을 것 같다. 다만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서의 눈물. 눈물이라고 말해지지 않은 것으로서의 눈물. 같지만 같지 않은 눈물.*

이승우·소설가

소설가 이승우

♦모린

안윤은 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쓴다. 흔하다는 건 평범하다는 게 아니라 익숙하다는 것이고, 뻔하지 않게 쓴다는 건 익숙한 것을 익숙하지 않게 표현한다는 뜻이다. 배율 바꾸기가 방법으로 동원된다. 망원경과 현미경은 멀리 있는 것을 선명하게 보거나 가까운 것을 크게 보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물은 이들 기구에 의해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육안의 배반이 아니라 보충이다. 다르게 보는 것이 잘 보는 것이다. 왜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고배율의 광학기구가 필요하다. 배율 바꾸기를 시간에 적용하면 슬로우비디오, 페이드아웃, 반복 등으로 나타난다. 안윤은 시간의 배율을 활용한다.

안윤의 문장은 섬세하고, 느리고, 여러 각도를 비추고, 뚝 끊어졌다 이어지고, 되풀이하고, 그래서 육안에 의지하는 빠른 묘사가 놓친 것을 붙잡는다. 사람의 감정에 특히 민감한데,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메커니즘을 가진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되고, 누군가의 감정을 섣불리 단정하는 것이 폭력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의 인물들은 아주 섬세하게 바느질을 하고(「핀홀」), 도자기를 수선하고(「틈」), 점자를 읽는다(「모린」). 관계에 있어 중요한 미덕이 조심스러움이라는 것을 안윤의 문장들은 깨우친다. 쉽게 포착되지 않는 삶은 쉽게 서술될 수 없다.

그는 세계가 여러 겹의 껍질로 덮여 있다고 믿기 때문에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 겹의 목소리를 동원한다. “이 세계에는 여러 겹의 껍질이 있다. 어떤 인생은 한 겹의 껍질이 전부인 줄로만 알다가 끝난다.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퍽 불운한 일이다.” 이 문장은 요제프 코발스키라는 가상의 작가가 쓴 책 「보이지 않는 것들」에서 발췌한 것이다. 네 명의 인물들이 긴 시간 맺어온 관계를 밀도 있게 서술하고 있는 이 소설 「모린」의 참 메시지는 이 가상의 작가가 쓴 책의 인용문에 있다. 이른바 액자를 가진 소설에서 핵심은 내부이다.

안윤은 여러 겹의 껍질 안쪽으로 들어가는 일을 소설 쓰기의 과제로 인식하는 부류의 작가인 듯하다. 그런데 내부는 보이지 않고,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 보이지 않는, 여러 겹 껍질의 안쪽 세계를 말하는 것은, 마치 “음악을 사진으로 찍어달라는 말과 다르지 않”아서 불가능하다. 그러나 안윤이 만든 가상의 인물은 이 불가능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음악으로 연주할 방법을 찾고 싶”어 한다. 아마 이것은 소설가 안윤의 욕망일 것이다. 창작자는 이런 일을 하(려)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장하지 않을 수 없다.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피아노 줄이 탕, 결연한 소리를 내며 끊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르는 관성이 끊어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런 순간을 기대하고, 그래서 이런 작가를 응원한다.

그 어려운 길을 작가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섬세한 헤아림에서 찾는다. 누군가의 마음을 받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때는 아주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것. 예컨대 한 사람은 ‘처음 팔꿈치를 내밀었을 때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고, 다른 사람은 ‘그 팔꿈치 뼈를 처음 쥐었을 때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해서 우리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 유일한 사람이기를 재촉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사람이 되는 조건이다. 이 작가가 제시하는 관계는 싱거운 것이 아니라 담담하다(「담담」). 담담함은 감정의 발산을 억제하는 데서 온다. 그런 점에서 윤리적이다. ‘담담함’이야말로 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지 않은 채 다른 사람에게 유일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는 사실을 『모린』에서 배운다.

김인숙·소설가

소설가 김인숙

♦봄밤의 모든 것

‘그녀는 식탁에 앉아 앵무새, 라고 써봤다. 앵무새가 갔다,라고 쓰려다 가버렸다, 라고 썼다. 앵무새가 가버렸다, 라는 문장을 보자 너무 고통스러워 그녀는 눈을 감아야 했다. 눈을 감자 주위가 캄캄해졌다.’

백수린 소설집 ‘봄 밤의 모든 것’ 중 첫 번째 단편소설 ‘아주 환한 날들’에 나오는 문장이다. 홀로 사는 노년의 여인인 이 주인공은 딸 내외의 부탁으로 한동안 앵무새를 돌봤다. 위 문장은 그 앵무새를 다시 딸 내외에게로 보낸 후, 노인이 겪는 저녁의 풍경이다. 캄캄해지는 풍경. 그것은 저녁의 풍경일 뿐만 아니라 노인이 머물러 있는 시간의 풍경이기도 하다. 백수린이 빚어내는 문장의 풍경이기도 하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들,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것들. 그것은 상실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고, 그 기억들 모두가 버무려져 마침내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 허무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허무는 응시할 수 없는 것. 응시하는 순간 허무가 아니게 되어버리는 것. 그러나 백수린의 문장이 얹혀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절대로 눈을 떼지 않고 응시하는데, 그 응시의 깊은 곳에 도사린 어둠이 보인다. 거대한 허방 같기도 하고, ‘가닿지 못하는 이야기’의 끝 같기도 하고, ‘몇 번이고 되돌아오는 슬픔’ 같기도 하다. 언뜻 감상적으로 여겨지는 이 문장과 감정의 편린들은 그러나 실은 고요하기보다는 고집스러운 응시의 힘으로 살아나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잃어버린 것들, 필히 잃어버릴 것들을 끝내 외면하지 않는 힘. 백수린의 소설은 읽기도 전에 안심하게 만드는데, 단정한 문장과 반듯한 서사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거니와, 그 이야기가 가닿을 곳이 내 상실의 깊은 곳일 것을 알기 때문이다. 들여다볼수록 낯설어지는 것. 낯설지 않은 감정에 버무려져 다시 지독하게 낯설어지는 것.

이번 소설집에서는 특히 시간이 많이 보인다. 지나간 것들을 광포하게 붙드는 대신 흘러가는 것을 관조하듯 바라본다. 작품 속 주인공들의 시간이기도 하거니와 작가의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시간은 지나간 후에야 보이는 것. 그러나 작가는 시간과 함께 같이 지나가는 대신 그 지나가는 시간을 본다. 그러다가 캄캄해진다. 그 캄캄해지는 순간에야 환하게 열리는 상실과의 대면, 백수린의 문장의 힘은 그런 곳에서 빛난다.

소설집의 끝에 실린 단편소설의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단순한 물음을 쫓아 회한과 고독을 발견하는 것이 아마도 백수린의 소설을 읽는 기쁨일 것이다.

김동식·문학평론가

김동식 문학평론가

♦봄밤의 모든 것

백수린의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무(無)로 돌아가려는 심리적 움직임에 기반하고 있다. 프로이트가 제시한 바 있는 타나토스를 연상해도 좋은데, 이때 타나토스는, 죽음 충동이나 자살 충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도 고통도 없는 정적(靜的)인 상태 즉 무로 돌아가려는 본능을 말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삶의 방향을 바꾸고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은 운명적 사건들이 모두 지나가버린 다음의 상태, 또는 운명적인 사건의 가능성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의 삶. 어느 정도의 문학적 표현이 용인된다면 비(非)운명의 삶 또는 운명 없는 삶이라고 해도 좋을, 그러한 삶.

단편 「아주 환한 날들」의 주인공 옥미도 그렇다. 70대의 그녀는 무료하고 권태롭지만 평온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살고 있다. 그녀는 평생교육원에서 수필 쓰기 수업을 듣고 있는데,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수요일 오후 3시에 개설된 수업을 듣는 것이 그녀의 루틴이기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녀가 수필 쓰기 수업에서 아직까지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녀가 운명 없는 삶,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 또는 무로 돌아가려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백부 집에 얹혀살았던 일,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얼굴에 수두 흉터를 가지게 된 일, 첫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옆집 삼촌 춘식의 죽음, 남편을 만나서 과일 트럭을 하며 먹고살았던 일, 엄마를 부끄러워하는 딸에게 손찌검을 했던 일 등등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그녀의 삶이 달라졌을지도 모를 운명적인 사건들이 그녀에게 없었을 리 없다. 하지만 그 운명적인 사건들마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無)를 향해 흘러가며 희미해져 가고 있다. 한 줄도 쓰지 못한 그녀의 노트는,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무(無)와 마주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그녀에게 작은 사건이 생긴다. 사위가 앵무새를 돌봐달라며 맡긴 것이다. 그 앵무새와 함께 지낸 두 달 동안도 별다른 일이 생긴 건 아니다. 귀찮을 것 같았는데 앵무새가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고, 앵무새에 대해 이런저런 공부를 했고, 시간을 함께 보내며 친밀감을 쌓았다. 앵무새 기르기는 손찌검 이후 아직까지도 엄마에게 냉담하기만 한 딸과의 상상적인 화해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조금 더 특별했을 수도 있다. 사위가 앵무새를 데려간 후, 옥미는 노트에 “앵무새”라고 쓴다. 그리고는 “앵무새가 가버렸다”라는 문장을 쓴다.

그렇다면 옥미에게 앵무새는 무엇이었을까. “그 시절, 그녀에게는 틀림없이 앵무새가 전부였다. 앵무새에게도 그녀가 전부였고.” 이를 두고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용어를 가져와 상상적 관계(아이와 엄마 사이의 상호결합의 관계)라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앵무새는 옥미가, 아무 것도 아니고 무(無)를 지향할 따름인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인 존재 또는 전부(全部)인 존재일 수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던 것이다. 삶의 운명적이고 예외적인 사건이 모두 지나가고 삶 자체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無)로 수렴되고 있다고 느끼는 상황에서도, 옥미는 자신의 존재 전체가 누군가에 의해서 요청되고 타인의 존재 전체가 나에 의해서 승인되는 사건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건을 여전히 꿈꾸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삶이나 인간에 대한 물음은 답도 없고 진부하다고 생각해서 밀쳐놓기만 했었는데, 백수린의 소설이 어느덧 어깨에 올라와 있는 앵무새처럼 삶과 인간에 대한 물음을 던져 놓았다. 문학상 심사를 위해 다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