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그림 공부하러 미국에 건너가 12년 고학(苦學)했다. 섬유 염색 공장에서 일하다 성대까지 상했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무모한 도전이었다는 좌절만 확인했다.” 1982년 귀국해 학원 강사 등으로 일하며 7년간 버텼다. “궁지에 몰리니 망하더라도 ‘내 얘기를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를 공부했다. 나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내 조상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았는가.”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에 참가하는 작가 전광영(76)씨는 고서(古書)로 감싼 삼각꼴 스티로폼 수천 개를 정교하게 붙인 한지 조각 ‘집합’ 연작으로 세계적 명성을 일궜다. 2018년 한국 작가로는 처음 미국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개인전도 열었다. “작가로서 앞이 캄캄했다. 몸져누운 어느 날 감기약을 먹으려다, 고향 강원도 홍천서 할아버지가 운영하신 한약방이 떠올랐다. 붓글씨 휙 적은 종이를 노끈으로 묶어 천장에 달아 둔 약 봉투의 기억.” 1989년이었다. “한국적인 기억을 ‘집합’하려 했다. 우리는 보자기처럼 뭔가를 감싸는 문화가 있다. 거기 정(情)의 미학이 담긴다.” 전시는 내년 2월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관과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열린다.
가장 한국적 소재로 세계 미술 시장에 우뚝 선 작가가 이번 전시에 출품한 집합 연작 ’100년의 증언'은 더 특별하다. 100년 전 조선일보 창간기념호와 올해 100주년 특별호를 한지(韓紙)에 인쇄해 작업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작품 속 1000개의 삼각꼴마다 염상섭·이광수·채만식 등 조선일보를 거쳐간 문인부터, 축구선수 손흥민 사진까지 들어간 이유다. “이번 100년 잔치는 한국 근현대사(史)의 ‘집합’이다. 이 작품은 내가 떠난 뒤에도 남아 오늘을 증언할 것이다. 한지라 1000년은 너끈히 견딜 것이다.” 그의 첫 ‘집합’ 연작도 신문지 작업이었다. “주변에 널린 신문지를 둘둘 말아 삼각형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너무 무겁더라. 무게를 줄이기 위해 한지와 스티로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인공의 산물을 자연의 재료가 감싼다는 의미도 들어간다.”
조각 이전에 그는 문자(文字)를 다룬다. 고서에 적힌 글자가 삼각형의 입체 표면에서 재배열되며 전혀 다른 의미로 조합되거나 대립한다. 2018년 영국 미술 출판사 템스앤드허드슨이 전 세계 문자 작가를 선정해 출간한 ‘The Word is Art’에 수록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이번에 한문 대신 한글이 들어가니 무늬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며 “뻔히 다 아는 글자인데도 신비한 기운을 풍긴다”고 했다. 기독교 ‘주기도문’을 활용한 작품 ‘주기도문’도 이번 특별전에서 처음 선보인다. “할머니가 홍천에 1952년 교회를 세우셨을 정도로 모태 신앙이다. 그래서 오래전 우리 집 식탁 앞에 ‘주기도문’으로 작은 ‘집합’ 연작을 만들어 걸어놨다. 밥 먹을 때마다 감사하려고. 그걸 이번 전시를 위해 크게 재제작한 것이다.” 기도 속 ‘일용할 양식’을 ‘한글’로 바꿔 읽어도 뜻이 상통한다.
내년 홍콩과 러시아 모스크바, 후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등에서 개인전이 예정돼 있다. “고서를 활용한 탓에 그간 ‘집합’ 연작은 한문으로 점철돼 있었다. ‘당신 중국인이냐’고 묻는 컬렉터도 있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작품 속 문양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누군가 ‘이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글’이라고 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