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성묘차 고향에 들른 김에 고추밭에서 동생의 일을 거들다보니 중천에서 따가운 햇살을 뿜어내던 해가 어느덧 그 위용을 잃고 서산마루에 허리를 걸쳤다.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자니 50여년 전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얘야, 해동갑하겠다. 서둘러라.”
해 질 무렵 고추 따는 일을 서둘러 갈무리하시는 어머니를 보고 나도 소 꼴 뜯기는 일을 멈추고 어머니가 미리 베어 놓은 꼴단을 양어깨에 메었다. 혼자 집에서 놀다 봉당에 나와 울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이 어린 동생 걱정에 가득 담은 고추 부대를 머리에 인 채 바삐 내딛는 어머니의 잰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길가의 풀 한 입이라도 더 뜯어먹으려는 소의 고삐를 잡아당겨야 했다.
‘해동갑’은 어떤 일을 해 질 무렵까지 계속한다는 뜻이다. 어머니 생전에 자주 쓰셨던 말로 나에겐 아직도 정감 있게 다가온다. 어머니는 내가 열 살 때 일제강점기 징용에서 얻은 폐병으로 기침을 달고 사신 아버지를 여의고 다섯 살 터울의 동생과 나를 위해 농사일과 가사를 도맡으셨다. 온종일 들판에 살다시피 한 어머니는 해동갑하기 일쑤였고, 해가 길 때는 새벽에도, 으스름 달밤에도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남보다 부지런하고 검소하셨던 어머니는 땅도 늘리고 돈도 모아 동리에서 손꼽히는 부자 소리를 들으셨지만 아흔 넘어서도 지문이 문드러진 손에서 호미 자루를 놓지 않으셨다. 구십칠 세에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기 전에도 이 밭에 나와 고춧대를 세운 북이 낮다며 밭이랑마다 호미로 흙을 돋우시던 어머니 모습이 생생하다.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마음의 편지를 하늘로 띄워본다.
“해동갑할라 걱정하시더니 그리도 서둘러 가셨습니까? 어머니, 기왕 사시는 거 백년은 채우셨어야죠. 평생에 보여주신 근면, 검약의 정신은 제 삶 속에서 살아 숨쉴 것입니다. 생전에 베풀어주신 따뜻한 사랑의 손길은 제 가슴 속에서 영원히 식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