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투쟁은 치열하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왕일지라도.
연극 '킹스 스피치(The King's Speech)'의 '버티'(조지 6세)는 말더듬증과 싸운다. 그는 연설을 많이 해야 하는, 왕위의 자리에 어쩔 수 없이 오른다. 그는 둘째 왕자이지만, 형은 사랑 때문에 왕위 계승을 포기했다.
라디오가 생기기 이전에 왕은 위엄 있어 보이는 척, 목소리 없이 연기(演技)만 잘하면 됐다. 하지만 목소리를 직접 들려줘야 하는 시대에는 다르다. 왕이 말로 전하는 단어, 문장, 그리고 뉘앙스 모두가 메시지가 된다.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1939년, 조지 6세의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작품이다. 그는 나치의 침략을 앞둔 연설에서 국민들이 연대하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용기를 줬다.
영화 '터커' 등의 극작가 데이비드 세이들러가 썼다. 2010년 콜린 퍼스 주연의 영화로 먼저 완성돼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12년 영국에서 초연한 연극의 완성도 역시 영화 못지않다. 라이선스로 이번에 국내 초연 중인 '킹스 스피치'는 교감과 믿음 그리고 연대와 투쟁의 이야기다.
극 중에서 버티를 마이크 앞에 당당히 세운 건 호주 출신 괴짜 언어치료사 '라이오넬 로그'다. 그 어떤 권위 있는 언어 치료사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로그는 초야에선 유명하지만, 제대로 된 자격증 하나 갖추고 있지 않다.
'셰익스피어 연극' 마니아로서, 극단 오디션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로그는 버티에게 화술을 전해주는 것을 넘어 자신을 깨고 나올 수 있게 돕는다.
모든 잘 만들어진 연극은 매끈한 서사를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탐구가 궁극적 목적이라는 걸 잊지 않는다. '킹스 스피치' 역시 마찬가지다. 이 연극이 좋은 작품인 이유는 감히 선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장애를 극복한 '인간극장' 식의 이야기도 물론 감동적이지만, '킹스 스피치'는 그 감동을 위해 각종 연극적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박정복과 조성윤의 버티는 절실하고, 서현철과 박윤희의 로그는 진실하다. 버티의 곁에서 용기를 주는 현명한 아내 '엘리자베스'(양서빈), 라이오넬의 꿈을 지지하는 머틀(이선주) 같은 여성 캐릭터 역시 타자화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킹스 스피치'는 특권층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별한 사람이 허물을 이겨내고, 더 특별해지는 '성장 서사'가 아니라 인간이 더 인간다워지고, 나아가 그 인간들이 구성하는 가족·사회가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인류가 코로나19와 맞서는 지금이 겹쳐진다. 투쟁하고 연대해야 하는 현실이 극과 맞물리기 때문에 가능한 인용이다.
영국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는 지난 4월 특별 대국민 연설을 통해, 코로나19 가운데 국민의 연대를 호소하고 희망을 얘기했다. 그녀는 '킹스 스피치'의 버티, 즉 조지 6세의 딸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엘리자베스 2세의 코로나19 관련 연설을 조지 6세의 1939년 라디오 연설로 재연됐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인류를 위협하는 역사적 위기의 형태는 다르지만, 그 앞에서 연대로 이겨내야 한다는 건 같다. '킹스 스피치'는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개인의 투쟁이 중요한 일임을 보여준다. 특히 그것이 공동체를 지키는 것과 연결됨을 강요하지 않고, 교감하며 증명한다. 버티 연설이 귀에 오랫동안 맴돈다. "이 전쟁에서 꼭 승리할 겁니다."
대학로 연극 브랜드 '연극열전8'의 네 번째 작품으로 각색은 작가 지이선, 연출은 김동연이 맡았다. 내년 2월7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오는 1월3일까지는 코로나19 2.5단계 방역 지침에 따라 두 좌석 띄어앉기를 적용한다.
한편, 올해 연극열전8은 코로나19 가운데에도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커플의 인생 여정을 그린 ‘렁스(LUNGS)’, 창작자 윤리와 예술의 진정성에 대한 화두를 던진 ‘마우스피스’, 가족의 해체와 정신건강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아들’, 그리고 이번 ‘킹스 스피치’까지 모두 국내 초연작으로 선보이며 호평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