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포 유, 투모로 포 미(Today for you, Tomorrow for me)!”

뮤지컬 ‘렌트’의 1막 초반, ‘앤젤’이 네온사인 번쩍이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등장해 노래하면 객석은 감전이라도 된 듯 비명에 가까운 환호와 박수로 들썩인다. ‘렌트’는 파리 옥탑방의 가난한 예술가들 이야기인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1990년대 미국 뉴욕 재개발 지역 젊은 예술가들 얘기로 옮긴 뮤지컬. 연인과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나눠주는 앤젤은 관객들에게도 가장 뜨거운 사랑을 받는 캐릭터다.

배우 김호영은 다섯 시즌 동안 7일까지 총 322번 뮤지컬 '렌트'의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 '앤젤'로 무대에 섰다. 이번 시즌이 김호영의 마지막 앤젤. 그는 "앤젤을 하고 싶어 하는 좋은 후배 배우들이 많다. 아쉬울 때 내려놓을 줄 아는 것도 어른이자 선배가 되는 과정 같다"고 했다. /신시컴퍼니

렌트는 미국에서 12년간 5123회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고, 세계 50국 25언어로 공연된 블록버스터 뮤지컬.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 초연 뒤 지금 9번째 시즌 공연이 열리고 있다. 그중 다섯 시즌 무대에 선 김호영(40)은 2002년 앤젤 역으로 뮤지컬에 데뷔했고, 7일까지 총 322회 앤젤로 무대에 선 21년 차 앤젤. 브로드웨이 1997년 프로덕션의 ‘앤젤’이었던 연출가 앤디 세뇨르는 김호영에게 “현존 세계 최장수, 최고령 앤젤이니 자부심을 가지라”고 농담하곤 한다. 이번 공연엔 보이그룹 2AM 출신 배우 조권(34)이 또 한 명의 앤젤로 더블 캐스팅됐다. 이제 막 18회 공연을 마친 ‘초짜 앤젤’이다. 조권은 렌트가 9번째 뮤지컬 출연. 지난 1일과 5일 따로 진행한 인터뷰를 두 배우의 대화로 재구성했다.

조권(이하 ) “앤젤은 나한테 운명이었나 봐. 2002년 연습생 시절, 호영 형 공연을 보고 온 원더걸스 선예가 내게 “너랑 똑같더라”고 했던 바로 그 역할이야. 2020년에 형 공연을 볼 땐 ‘내가 저걸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번 공연 오디션 소식 듣고 소속사에 바로 “나 이거 꼭 해야 돼요!” 했잖아. 오디션엔 12㎝짜리 하이힐을 신고 들어갔어. 힐을 신으면 수퍼 히어로가 된 기분이거든. 어떻게든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 캐스팅 되든 안 되든 내 존재감을,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김호영(이하 ) “내게도 운명이었던 것 같아. 친구 따라 오디션장에 갔다가 덜컥 ‘앤젤’이 됐거든. 엄마한텐 ‘솔로는 한 곡이고, 난 중간에 죽어’ 그랬더니 ‘어떻게 첫술에 배부르니,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 하시더라고. 근데 공연 첫날 와서 보니까 웬걸, 내가 거의 주인공인 거야. 엔딩 때 다시 무대에 오르는 걸 보고 우리 엄마 거의 실신! 하하하. 어릴 때부터 늘 ‘우리 아들은 수퍼스타가 될 거야’ 하셨던 엄마가 정말 기뻐하셨지. 출발이 렌트처럼 좋은 작품이었던 덕에 나도 지금껏 단단하게 배우로 살아올 수 있었고.”

뮤지컬 '렌트'에 '앤젤'로 함께 출연 중인 배우 김호영(왼쪽)과 조권. /배우 조권 제공

“어릴 때부터 별종이라는 얘길 정말 많이 들었어. 작고 왜소했고, 학교에서 따돌림도 당했고. 하지만 철이 들고 성장하면서 ‘나는 특이한 게 아니라 특별한 사람이구나’ 생각하게 됐어.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남한테도 사랑을 줄 수 없잖아. 앤젤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이미 터득한 사람 같아. 앤젤은 꼭 미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 난 앤젤을 연기할 수 있는 특별한 내가 좋아!”

“앤젤로 무대에 서면서 나름 삶의 철학이 생긴 것 같기도 해. 첫 작품이고 메시지를 계속 되새기다 보니 영향을 많이 받았겠지. 처음 앤젤로 무대에 섰을 땐 그 무대가 너무 소중해서 앉으나 서나 누굴 만나던 렌트 속 노래처럼 ‘오직 오늘뿐(No day but today)!’이라는 말을 많이 했거든. 대학 때 별명이 ‘호이’였는데, 그게 또 스페인어로 ‘오늘(hoy)’이라는 뜻이더라. 사랑으로 오늘 하루를 충실하고 아름답게 살자, 오직 오늘뿐!”

조 “형이랑 원래 친했지만, 앤젤을 하면서 형을 정말 존경하게 됐어. 난 진짜 김호영 못지않다는 소리 듣고 싶어요. 첫 공연 전날 의상 다 갖춰 입고 하는 드레스 리허설 끝났을 때 형이 딱 나한테 오더니 ‘너 진짜 특별하더라’고 해줬잖아. 그 말 들었을 때 정말 눈물 나게 기뻤어.”

“에이그~ 그래서 연습 너무 열심히 하다가 내가 특별 주문 제작한 드럼 스틱까지 다 해드셨어요? 하하하. 드럼 스틱과 치마도 네 것까지 다 사서 나눠줬잖아. 공연 중에 의상 빨리 바꿔 입는 요령 같은 것부터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다 알려줄게. 그래도 ‘김호영표 앤젤’은 98%만 전수할 거야. 나머지 2%는 너 스스로 찾아야 해!”

김호영은 “앤젤은 풋풋함과 사랑스러움이 필요한 역할”이라며 “여전히 피부도 관절도 쌩쌩하지만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앤젤을 내려놓고 후배에게 물려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두 배우는 이번 9번째 시즌의 총 123회 공연에서 앤젤을 나눠 맡는다.

공연은 서울 삼성동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에서 내년 2월 2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