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12월, 청나라가 조선을 쳤다. 40여일간의 짧은 전쟁이었지만 나라는 폐허가 됐다. 왕도, 사대부도 힘들었지만, 약한 자들의 고통은 더 컸다.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성들이 특히 그랬다. 살아 돌아왔을 뿐인데 ‘환향녀’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이혼을, 자결을 강요받았다.
뮤지컬 '여기, 피화당'은 17세기 조선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성들의 이야기다. 도망친 세 여자가 '피화당'으로 이름 지은 동굴에 숨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서사가 전개된다. 최초의 여성 영웅의 모습을 통해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담았다.
'여기, 피화당' 김한솔 작가는 15일 서울 대학로 플러스씨어터에서 열린 프레스콜에서 "작자미상의 박씨전은 병자호란 후에 쓰여졌고, 당시는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이 이혼과 자결을 강요받던 때였다"며 "한글로 쓰여진 이 소설을 이들 중 하나가 쓴 건 아닐까 하는 상상력에서 이 작품이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세 여인이 종이 위의 글을 통해서나마 울분을 표출하고, 사대부를 비판했던 것 아닐까 상상해봤어요. 극중극으로 작품 중 '박씨전'의 내용이 표현되는데 박씨가 처음에는 탈을 쓰고, 두번째는 부채를 들고, 세번째는 아무 것도 없이 나옵니다. 숨어살다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세 여인의 모습처럼요."
김한솔 작가는 "전쟁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지금 이 시대에도 세 여인이 겪은 일들은 반복되고 있다"며 "그래서 이 이야기가 3명의 여인 뿐 아니라 그 겨울, 모든 여인들의 이야기이길 바랐다. 현재도 존재하는 그런 여인들에게 이 뮤지컬이 피화당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아쟁과 해금 등 국악기와 어우러지는 넘버들이 관객의 몰입을 이끈다.
작곡가 김진희는 "피화당의 배경이 조선이고,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픽션이기 때문에 국악적 느낌을 살렸다"며 "전체적으로 국악기가 현대적인 음악어법과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했고, 극중극으로 나타나는 '박씨전' 부분에서는 국악기를 추가하고 마당극 판소리 분위기를 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저잣거리에서 인기있는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피화당의 작가 '가은비' 역은 정인지·최수진·김이후가, 자신의 글을 의뢰하는 선비 '후량' 역은 조풍래·조훈이, 남장을 하고 이야기를 저잣거리에 파는 '매화' 역은 정다예·장보람이, 가은비의 몸종 '계화' 역은 백예은·곽나윤, 후량의 노비 '강아지' 이찬렬·류찬열이 연기한다.
'가은비'를 연기하는 정인지는 "이번 공연을 앞두고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접했던 박씨전을 다시 읽었는데 느낌이 정말 달랐다"며 "극중 박씨전의 3번째 이야기까지 완결됐을 때 벅찬 감동이 있다"고 했다.
최수진은 "창작 초연이라 우리가 만드는 캐릭터가 가은비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신경을 많이 썼다"며 "극중 극에서 박씨로 분할 때 조선의 여성으로서 가은비가 가진 억눌린 부분들을 마음껏 표출하고 해소해 캐릭터가 재미 없고 무색무취해지지 않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김이후는 "극 중 '아무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라는 넘버가 있는데 작자미상 '박씨전'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이 뮤지컬이 관객 앞에서 공연하고 전달되는 것이 너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후량'을 연기하는 조풍래는 "작품이 단지 하나의 극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했고, 조훈은 "다섯명 모두 조금씩 용기를 내서 한 걸음씩 나아간다는 게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강아지'를 연기하는 이찬렬은 "국악기가 들어가고 판소리로 작품을 풀어내는 부분이 매력 있다"고 했고, 류찬열은 "극중 강아지는 노비이지만 후량과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을 쌓는 '망형지우'"라며 "신분을 뛰어넘으면서도 선을 안 넘는 장난을 어떻게 보여드릴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계화' 역을 맡은 백예은은 "그 시대의 이야기를 책임감 있게 써내려간 작품"이라고 말했고, 곽나윤은 "극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보자는 희망을 갖고 연대하는 모습에 위로와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매화'를 연기하는 정다예는 "작품을 하며 내가 누군가의 '피화당'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따뜻한 메시지를 가진 작품"이라고 말했다. 장보람은 "매화는 세상을 비관하고, 사람에게 상처받은 인물"이라며 "그런 가운데서도 가은비와 계화를 지키려는 동질감, 연대감을 표현하려 했다"고 말했다. 오는 4월14일까지 서울 대학로 플러스씨어터에서 공연.
◎공감언론 뉴시스 pjy@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