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기형도 플레이' 중 '빈집' 에피소드. 남편과 아내가 함께 타고 가는 열차 안, 오래 전 죽은 친구에 관한 엇갈리는 기억이 지금 두 사람의 관계에 상처를 낸다. /극단 맨씨어터

함께 열차를 타고 가던 아내와 남편. 사소한 말다툼이 15년 전 이미 죽은 한 남자의 이름을 불러낸다.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아내의 연인이었던 남자. 엇갈리는 기억이 칼날처럼 오래된 상처를 헤집을 때, 서로 그 남자에게 선물받았다고 기억하던 시집을 남편이 읽는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 집’)

2023년 10월 초연 당시 소극장 공연을 전석 매진시키며 화제를 모았던 연극 ‘기형도 플레이’가 대학로에 돌아왔다. 작가 9명이 고(故) 기형도(1960~1989)의 시 9편을 각각의 짧은 이야기로 만든 극단 맨씨어터(대표 우현주)의 옴니버스 연극. 기형도는 유작이 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으로 1990~2000년대 청춘의 집단 기억을 사로잡았던 시인이다. 그를 기억하는 관객들이 이번에도 조용히 극장 앞에 줄을 선다.

재개발에 인생을 저당 잡힌 부부 이야기 ‘바람의 집’. 요절한 시인 기형도의 시를 모티브로 한 옴니버스 연극 ‘기형도 플레이’ 중 한 에피소드다. /극단 맨씨어터

부부의 엇갈린 기억에 관한 ‘빈집’(유희경 작), 세상 모든 소리를 듣게 된 대학생들 이야기 ‘소리의 뼈’(조인숙 작), 철들지 못한 채 속수무책 나이만 먹어 가는 작가 지망생의 헛소동 ‘질투는 나의 힘’(천정완 작) 등 기형도의 시를 모티브로 한 짧은 이야기들이 빠짐없이 단단하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 ‘흔해빠진 독서’, ‘바람의 집’,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위험한 가계·1969′, ‘조치원’ 등 총 9편의 이야기 중 매일 5편이 관객과 만난다.

서울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내달 4일까지, 전석 5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