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승범 교수는 “박정희는 17세기 초에 ‘충’이 ‘효’에게 양도했던 권위를 약 350년 후에 되돌려 놓았다고도 볼 수 있다”고 했다. /남강호 기자

조선 시대 유교의 핵심 가치였던 충(忠)과 효(孝)는 어느 쪽이 우선시됐던 개념일까? 16세기까지만 해도 성리학적 틀에서 서로 대립되지 않는 개념이었지만, 17세기 초 한 사건을 계기로 ‘효’가 ‘충’에 대해 완승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그 ‘사건’이란 1623년(인조 1년)의 인목대비 복위였다.

최근 연구서 ‘모후의 반역’(역사비평사)을 낸 계승범(61)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조선은 인목대비 폐위와 복위 사건을 전환점으로 ‘효치(孝治) 국가’로 변모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 배경에는 적자도 맏아들도 아닌 세자로서 부왕 선조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던 광해군의 불안한 배경이 있었다. 명나라로부터 다섯 번이나 세자 책봉을 거절당하는 굴욕도 겪었다. 여기에 자신보다 아홉 살 어린 계모 인목왕후(통칭 인목대비)와 그 장자 영창대군의 존재는 불안감의 원천이나 다름없었다.

1613년(광해군 5년)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등이 역모로 몰려 죽은 계축옥사가 일어났고 ‘인목대비가 역모에 내응했다’는 혐의가 불거지면서 논쟁이 시작됐다. 계 교수는 “실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광해군이 당쟁에 희생당했거나 대북파 세력에 끌려다녔다’는 기존 해석은 수정돼야 한다”고 했다. 폐위 문제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며 신료들을 좌지우지했던 사람은 바로 광해군이었다는 것이다.

이 논쟁에서 충과 효는 정면으로 부딪쳤다. ‘대비가 반역을 한 것 같지는 않다’고 했던 이원익과 이항복이 유배된 이후 반역의 사실 자체는 의심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됐고, ‘반역을 했다 해도 어머니를 벌주는 게 옳으냐’는 문제를 둘러싸고 온갖 역사와 논리를 끌어들인 논변이 펼쳐졌다. ‘왕은 공인이므로 모자 간의 의리보다 군신 간의 의리가 더 중요하다’는 폐위론자들이 일단 승리했고, 계축옥사부터 인목대비 폐위에 이르는 5년 동안 반대론자들은 폐위론자들에게 밀려 축출당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목대비가 복권되자, 권력을 잡은 서인들은 광해군의 큰 죄로 ‘불효’를 들었다. “효가 충을 누르고 제1가치로 올라선 것입니다.” 계 교수는 “이후 조선에서 군주에 대한 ‘충’은 희미해졌고, ‘충’은 오히려 자기 당파의 영수에 대한 충성을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일제와 광복을 거치며 군주를 복위하자는 복벽론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것도 이런 현상의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20세기에 들어서서 남한의 박정희, 천황제를 벤치마킹한 북한의 김일성 집권기에 와서야 다시 ‘충’의 의미가 살아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전통적인 폭군이었으나 최근 들어 ‘현군’의 이미지가 강해진 광해군은 과연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한쪽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보다는 세자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피해망상에 사로잡혔던 사람으로 볼 수 있죠.” 광해군은 자신의 안위에 병적으로 집착했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이중 외교를 펼쳤던 것도 잡혀가지 않고 살아남으려는 대책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