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바위’란 표지석이 있는 바위 바로 뒤에 높은 회색 가림막이 쳐져 있었다. 바위와 가림막의 거리는 불과 10m 정도였고, 그 뒤의 풍경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충남 아산시 인주면 해암2리의 이순신(1545~1598) 장군 유적지 해암(蟹巖·게바위)이다. 김구연(54) 이장은 “주변 경관이 다 차단돼 예전에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없고, 동쪽 현충사 방향을 바라볼 수도 없게 됐다”고 말했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길을 떠난 뒤 모친의 시신을 맞은 장소인 충남 아산시 인주면‘게바위’뒤에 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가림막이 쳐져 있다. 게바위와 가림막의 간격은 10m 정도다. 가림막 뒤로 11m 높이 성토 작업 위에 도로가 들어서게 된다. /유석재 기자

게바위 유적이 위기에 처했다. 지난해 공사를 시작해 2024년 개통 예정인 서부내륙고속도로 1단계 구간(평택~부여)의 제12공구 도로가 게바위 바로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비켜 지나가는 것. 가림막 뒤로는 4층 건물 높이인 11m의 성토 작업을 벌인 뒤 그 위에 도로를 만들게 된다. 주변 경관과 길이 막힌 게바위는 거대한 ‘고속도로 장벽’ 아래 갇히다시피 처박히게 되는 셈이다. 이순신 장군 후손들과 이명수 국민의힘 의원(아산갑) 등은 “이렇게 도로를 만들면 안 된다”고 반대하고 있다.

잘 모르고 보면 자연석에 불과한 게바위엔 각별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순신 장군의 일생에서 가장 비통한 장면이 펼쳐진 장소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중인 1597년(선조 30년) 모함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한 이순신은 서울로 끌려가 의금부에서 고초를 겪은 뒤 백의종군하기 위해 경남 합천으로 향했다. 이때 전남 여수에 있던 모친 변씨가 아들의 소식을 듣고 급히 뱃길로 올라오던 중 세상을 떠났다.

고향 아산의 게바위 포구에서 어머니를 맞으려던 이순신은 4월 13일 이곳에서 부고를 듣고 죄인의 신분으로 모친의 시신을 맞았다. 조카 이분이 쓴 ‘행록’은 이때 이순신이 통곡하며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자 했건만 죄가 이미 이르렀고, 어버이께 효도하려 했으나 어버이마저 떠나셨네(竭忠於國而罪已至, 欲孝於親而親亦亡)’라 절규했다고 기록했다.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충효의 화신이라 할 이순신 장군이 자기 의지나 행동과 무관하게 마치 ‘불충·불효자’처럼 돼 버린 기가 막힌 장소”라고 말했다.

이토록 중요한 유적지와 맞붙은 도로가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비(非)지정문화재’기 때문이다. 1979년 삽교천방조제 완공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게 된 뒤 방치돼 있다가 한 독지가가 땅을 사들여 아산시에 기부채납했고, 2006년에야 향토문화유산이 됐다. 그러나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이나 시·도 지정문화재, 등록문화재가 아니기 때문에 문화재보호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명수 의원은 “국토교통부와 민자 사업자 측에 여러 차례 의견을 개진했으나 ‘이미 정해진 노선을 바꿀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차선책은 게바위 옆을 지나는 구간을 교량으로 만들어 시야와 통로를 조금이나마 확보하는 것이다. 400m 길이 교량에 160억원, 100m 라면 70~80억원 정도가 드는데 아산시는 금액이 너무 많다며 난색을 보이고 있다. 이 의원은 “만약 도로가 그대로 건설되고 나면 바꿀 수 없을 것이란 판단에, 먼저 시공부터 하고 나중에 지자체가 납부하도록 하면 안되겠느냐고 설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종천 덕수이씨 충무공파 종회장은 “학생과 군인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계승하자며 걷는 ‘백의종군로’가 중요한 곳에서 끊기게 됐다”며 “지정이냐 비지정이냐를 따지며 유적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이냐”고 했다.

아산=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