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문서에 기록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자 813명’은 조선총독부 도쿄출장소에서 조사한 학살자 수다. 당시 일왕의 직속 기관이던 조선총독부가 수행한 조사이기 때문에 결국 일본 정부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수치는 관동대지진 당시 도쿄에서 발표된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일본 사법성은 피살된 조선인 희생자 수를 233명이라고 발표했고, 내무성 정보국은 조선인 사망자 231명, 오인된 일본인 사망자 59명이라고 발표했다. 조선총독부 조사와 차이가 난 것은 학살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조사 방해와 은폐 공작을 통한 학살 규모 축소가 있었던 방증으로 보인다.
국내 학계는 보통 당시 학살된 조선인의 규모를 ‘6000여 명’으로 보고 있다. 근거는 1923년 12월 상하이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이 보도한 6661명이란 숫자다. 이것은 재일 조선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재일본 관동지방 피재 조선동포 위문단’이 요코하마, 가나가와, 사이타마 지역을 상세하게 조사한 결과였다. 이 조선동포 위문단이 10월 말까지 조사한 자료를 근거로 한 것이 당시 일본 잡지 ‘중앙공론’의 편집자였던 요시노 사쿠조의 자료로, 조선인 피살자가 2613명이라고 했다.
서종진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장은 재일 사학자인 고(故) 강덕상 재일한인역사자료관장이 ‘관동대지진 당시 관동 지방의 조선인 거주자는 약 2만명, 행방불명된 사람은 약 9000명’이라고 산정한 것을 근거로 “독립신문에 보도된 희생자 6661명 통계는 실제 수에 상당히 가까울 것”이라고 했다. 강덕상 관장이 산정한 ‘실종자 9000명’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자와 삶의 터전을 잃고 이주하거나 귀환한 조선인을 포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2013년 새로운 자료와 수치가 나왔다. 한일근대사 전공자인 강효숙 박사가 1924년 3월의 독일 외무부 영문 자료인 ‘일본에서의 한국인 대학살(Massacre of Koreans in Japan)’을 분석한 결과 당시 학살된 조선인은 모두 2만3058명이라는 것이다. 이 중 경찰이 577명, 군대가 3100명을 학살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당시 관동 지방의 조선인 거주자 수에 비춰볼 때 상당한 오류를 안고 있는 수치라는 지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