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완공된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 앞을 시민들이 산책하고 있다. 벧엘예배당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으로 파이프오르간과 서양식 결혼식 등 근대 문명을 실제로 체험하는 공간의 역할을 했다. /박성원 기자

“오늘 죽음의 철창을 산산히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와 빛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1885년 4월 5일 조선에 도착한 헨리 아펜젤러(1858~1902) 선교사는 이런 기도를 올렸다. 마침 이날이 부활절이라는 점이 그에게 특별한 소명으로 다가왔던 것일까.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로 파송된 아펜젤러는 1902년 선박 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7년간 이 땅에 하나님의 자유와 빛을 선물하기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입국 당시 키 179㎝, 체중 91㎏으로 기골이 장대한 청년이었던 그는 15년 만인 1900년엔 체중이 무려 30㎏이나 줄고 머리는 희고 허리는 굽어 가까운 친구들조차 못 알아볼 정도였다고 한다.

장로교의 언더우드가 그랬듯이 아펜젤러의 모든 발걸음은 한국 감리교의 새 길을 개척하는 것이었다. 1885년 10월 13일 서울 정동 그의 집에서 첫 성찬식을 올리면서 정동제일교회를 창립했다. 한국 감리교 ‘어머니 교회’가 탄생한 것. 이후 감리교 첫 세례식(1887. 7.), 첫 여성 세례식(1887. 10.), 첫 여성·남성 주일학교 시작(1888), 첫 구역회(계삭회) 조직(1889) 등 하나하나가 모두 최초였다. 1885년 11월 출생한 딸 앨리스는 ‘한국에서 태어난 첫 서양 아기’였다.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 바로 옆의 초가집과 비교해볼 때 당시 시민들이 느꼈을 문화적 충격을 짐작할 수 있다. /정동제일교회

◇左배재·右이화

교육은 아펜젤러 선교 사역의 기둥이었다. 1885년 8월 3일 영어를 배우러 학생 2명이 그를 찾아온 것이 배재학당의 시작이었다. 서구 열강과 잇따라 수교하던 조선엔 영어 수요가 넘쳤고, 영어와 신문물에 목말랐던 학생들이 몰렸다. 1887년 2월 고종에게서 ‘배재(培材)’라는 교명을 하사받은 아펜젤러는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라는 마태복음 구절로 교훈(校訓)을 삼았다. 1887년 9월 벽돌 단층 건물로 서양식 교사(校舍)를 지은 아펜젤러는 “이 학교를 조선 복음화의 원동력으로 삼으려 한다”고 일기에 적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교회를 중심으로 왼쪽엔 배재학당, 같은 감리교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턴(1832~1909) 여사가 설립한 이화학당은 오른쪽에 자리 잡아 좌(左)배재, 우(右)이화 구도가 만들어졌다. 교회에 출석한 두 학당의 남녀 학생들은 정동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한국의 청년 문화를 태동시켰다.

벧엘예배당에 1918년 최초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된 후 여성 신자들이 기념촬영했다. /정동제일교회

◇근대 문명 체험의 장, 벧엘예배당

1897년 12월 완공된 벧엘예배당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이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명동성당보다 1년 앞서 건축된 예배당은 서구 신문물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서양식 예배당에 대한 세상의 관심은 매우 뜨거워 1897년 5월 9일 지붕만 올린 상태로 방석을 깔고 첫 예배를 올렸을 정도였다. 1918년에는 한국 최초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돼 장안의 명물이 됐다. 벧엘예배당은 또한 김우영·나혜석 커플 등 명사들의 신식 결혼식 장소로도 유명해졌다.

최초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어진 예배당은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800명까지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넓어졌고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안방 진출

정동제일교회는 초기부터 여성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아펜젤러는 1887년 10월 16일 ‘최씨 부인’에게 세례를 준 후 “우리 감리교가 안방에까지 진출했다(inroad into Ang Pang)”며 기뻐했다. 이후 교회 내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조선 사회의 폐습 근절에 대한 목소리도 커졌다. 1920년대 교회 여성회는 금주·금연 운동을 펼치며 ‘전국 술값 다 합하여/곳곳마다 학교 세워/자녀 수양 늘 시키면/동서 문명 잘 빛내리’라는 가사가 등장하는 ‘금주가’도 보급했다. 교회는 1916년에는 남녀 좌석을 가르던 가림막까지 철거하면서 남녀 구분을 없애는 데 앞장섰다.

벧엘예배당이 완공됐을 당시 정동제일교회 주변 약도. 교회 왼쪽엔 배재학당, 오른쪽엔 이화학당이 자리하고 주변에 외교 공간이 들어선 모습이다. /정동제일교회

◇토론 문화의 산실

벧엘예배당이 완공된 1897년 12월 말 교회에서는 기념 토론회가 잇따라 열렸다. 12월 31일의 토론회 주제는 ‘여성 교육이 가(可)하냐’. 남성 연사들의 찬반 토론이 이어지던 중 청중석의 여성회(조이스회) 회원이 일어나 일갈했다. “하나님이 이 세계 인생을 내실 때 남녀의 권리를 같게 하셨다. 남녀가 동등한 교육, 동등한 권리를 가져 인생에 대한 사업을 각기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 에피소드는 120년 전 토론회 풍경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혁신적이다.

토론 문화는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 배재학당 청년 조직인 협성회의 전통이었다.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주시경 등이 네트워크의 주역이었고 아펜젤러가 든든한 후원자였다. 갑신정변(1884) 후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은 1895년 귀국 후 아펜젤러의 사택에 머물며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했으며 배재학당에서 강연했다. 독립문 기공식에선 아펜젤러가 기도하는 등 기독교 의식으로 진행됐다. 1898년 서재필이 다시 추방되자 독립신문 발행은 아펜젤러가 맡기도 했다.

◇3·1운동 요람…일제 탄압으로 교인 절반 줄어

아펜젤러는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중 군산 어청도 앞바다에서 선박 충돌 사고로 순직했다. 그러나 그가 뿌린 독립 정신의 씨앗은 정동제일교회를 바탕으로 자라났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정동제일교회는 중심에 있었다. 이 교회 이필주 담임목사가 민족 대표 33인 중 감리교 대표로 참여한 것을 비롯해 숱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것. 1920년 9월 옥중에서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수습해 10월 14일 장례를 올린 곳도 정동제일교회였다. 독립운동에 앞장선 대가는 참혹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1917년 2283명이었던 교인은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에는 1119명으로 급감했을 정도다. 정동제일교회는 매년 3·1절 무렵 주일학교 어린이들과 함께 국립현충원을 방문하여 교회 선배들의 넋을 기리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아펜젤러 순직 후 정동제일교회 교인들은 추모의 뜻을 담아 종(鐘)을 만들고 ‘경세종(警世鐘)’이란 이름을 붙였다. ‘세상을 깨운다’는 뜻이다. 경세종은 지금도 벧엘예배당 종탑에서 매년 12월 31일 자정 송구영신 예배 때마다 울리며 세상을 깨우고 있다.

감리교와 장로교… 교파 구분하지 않고 힘 합친 선교사들

“지난주 일요일, 이달 11일에 우리는 기도와 간증 모임에서 성찬식을 거행했습니다. 이것이 개신교에서 거행한 조선 최초 성찬식이었습니다.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와 제가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었는데 참석한 사람은 11명이었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는 1885년 10월 13일 보고서에서 이렇게 적었다. 지금은 개신교 교단이 여러 교파로 갈라져 있지만 초기 선교사들은 감리교, 장로교 구분 없이 모든 사역을 함께했다. 경쟁하지 않고 선교 지역 구분을 합의했으며 성경 번역도 공동으로 했다. 중요한 역사적 현장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늘 함께했다. 조선 복음화라는 대원칙 앞에서 서로 양보하고 협력한 결과이다. 오늘날 교회 일치 운동(에큐메니컬)의 원조인 셈이다.

두 선교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와 새문안교회는 지금도 서로 교류하면서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달 30일 두 교회가 공동 주최한 ‘한국 선교 14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천영태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한 두 교단 선교사들 사이에는 진정한 ‘성령의 하나 됨’이 존재했다”며 “이는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역자와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이들이 오늘날에도 구하고 이뤄야 할 모습”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