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왼쪽)와 '용의 눈물'의 배우 박병호. /스포츠조선
'폭싹 속았수다'(왼쪽)와 '용의 눈물'의 배우 박병호. /스포츠조선

지난해 별세한 원로 배우 오현경(1936~2024)씨에 대해, 많은 분들이 ‘TV 손자병법’의 만년 과장 이장수 역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1987년부터 1993년까지 6년 동안 방송된 이 드라마는 직장인의 애환을 담은 이야기로 많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오현경씨가 샐러리맨으로, 그가 근무하는 회사가 주 무대로 등장하는 드라마는 ‘TV 손자병법’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9년 전, 실로 ‘TV 손자병법’의 프리퀄과도 같은 드라마가 있었으니, TBC(동양방송)에서 1978년 8월 21일부터 1980년 8월 31일까지 2년 동안 방영한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잊힌 드라마, ‘내일도 푸른하늘’이었습니다.

‘내일도 푸른하늘’은 매일 뉴스 직전 10~15분 방영했던 아주 짧은 드라마였습니다. 요즘 ‘숏폼 드라마’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죠. 게다가 한 회당 한 주제로 기승전결이 이뤄졌고 심철호·한주열·배일집 같은 코미디언들이 오현경의 직장 동료로 나왔다는 점에서 지금의 기준으로는 ‘시트콤’이라고 할 만했습니다. 다만 당시엔 그런 용어가 없었죠.

그런데 이 드라마가 무슨 콘셉트로 이어졌느냐 하면… 이건 사실 당시 기준으로 봐도 좀 황당했습니다. 1회에서 샐러리맨 맹두칠(오현경)이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그를 데리고 가려고 저승사자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저승사자는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니라 모자에서 양복과 지팡이, 구두까지 온통 하얀 색 차림입니다. 맹두칠이 사자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인정 많은 사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 지난날처럼 허랑방탕 살지 않고 제대로 살겠다면 내 한번 이승으로 돌려보내 주지. 하지만 만약 나쁜 짓을 하거나 나쁜 짓을 보고도 못본척하는 날에는 다시 데려갈 거야!”

이렇게 해서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맹두칠은 뭔가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할 뻔하거나 불의를 보고도 지나갈 뻔할 때마다 (사실은 한 회에 한 번씩 꼭) 흰 양복 복장 그대로 이승에 나타난 저승사자와 마주치게 됩니다. 사자는 나타날 때마다 “자네~!”라고 경고하며 맹두칠을 훈계합니다. 맹두칠은 어딘가 어수룩하고 어리벙벙한 ‘서민의 대변자’처럼 그려지죠.

그런데 그 아슬아슬하게 사자와 마주치는 일이라는 게, 맹두칠이 그렇게 크게 잘못하거나 일탈하는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탓에 웃음을 자아냅니다. 맹두칠이 뇌물의 유혹에서 갈등하는 상황까지는 이해가 갑니다만, 저승사자가 “왜 공공질서를 지키지 않나?” “국산품도 품질이 좋은데 왜 굳이 외제품을 선망하나?” 같은 대사를 할 때는 ‘무슨 저승사자가 제4공화국 정부를 대변하는 것처럼 저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초등학생이었지만 말입니다. 나아가 ‘이거 국민을 감시하는 유신 정부의 당국자를 형상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저승사자는, 사실은 맹두칠을 감시해서 어떻게든 저승으로 데려가려는 것이 아니라, 맹두칠이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그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속 깊은 친구였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사기를 당할 뻔한 맹두칠을 일깨워 주거나, 맹두칠에게 버릇없이 구는 청년을 혼내주고, 착실한 태도로 내일을 향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역할 말입니다. 나도 저런 친구가, 저런 멘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1980년 ‘동짜몽’(일본 만화 ‘도라에몽’의 해적판)이란 만화가 국내 발매되자 이런 생각이 또 들었습니다. “그 저승사자는 동짜몽이었구나!”

이 드라마에서 맹두칠의 아내 역은 연운경이, 아들 역은 김지훈이 맡았습니다. 당시 김지훈은 이 드라마의 인기를 타고 같은 TBC 프로였던 ‘장수만세’(MC 황인용)에 일가족이 출연했고, 엄마 역 연운경도 잠시 스튜디오에 나왔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1980년 9월 1일부터는 ‘무지개 가족’이란 제목의 후속편이 나왔는데, 맹두칠 가족이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하고, 옆집에 사는 마영달(이성웅)과 그 아내(서승현)와 만나게 됩니다. 마영달 부부는 같은 TBC 드라마 ‘야 곰례야’에서의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죠(실제로 이성웅은 자기 예명을 ‘마영달’로 바꾸기까지 했습니다). 한편 저승사자는 맹두칠에게 편지를 보내 “자네가 어느정도 정신을 차린 듯하니 이제 곁에서 감시하는 걸 그만두고 일단 저승으로 올라가서 보겠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무지개 가족’은 3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1980년 11월 27일 종영하게 됩니다. 도대체 왜?

1980년 11월 30일,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정책으로 인해 TBC 방송국 자체가 문을 닫았기 때문입니다. 이 프로그램이 사람들에게 잊힌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요즘들어 KBS가 TBC 시절의 온갖 자료들을 유튜브에 올리는 상황에서도 ‘내일도 푸른하늘’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유실돼 버린 것 같습니다.(놀랍게도 이 드라마의 스틸사진 자료 일부와 방영 정보가 인터넷에 남아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siffler/221119781368) 다음날인 12월 1일부터는 TV의 컬러 방송이 시작됐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은 흑백TV 시절의 마지막 드라마였습니다. 다만 조용필이 주제곡 ‘촛불’을 부른 정윤희 주연의 ‘축복’, 추송웅과 서승현 부부가 똑순이(김민희)의 부모로 나왔고 이낙훈과 강부자, 장미희와 차화연이 출연했던 ‘달동네’는 TBC에서 KBS로 갈아타는 데 성공해 한동안 살아남았습니다.

자, 그런데 그 저승사자 역할을 한 배우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때로는 주인공을 골탕먹이는 짓궂음을 보이면서도 마음이 따뜻한 멘토의 기품을 잃지 않았던 그 배우는, 박병호씨였습니다. 1937년생이니 실제로는 오현경씨보다 한 살 아래였습니다. 1962년 KBS 공채 1기 탤런트였던 박병호씨는 1960년대엔 주로 형사반장 역할을 맡았다고 합니다만 제가 볼 수 없던 시대여서 통 모르겠고, 가장 처음 기억나는 드라마가 저 ‘내일은 푸른하늘’이었습니다.

배우 박병호

부리부리한 눈매로 어딘가 역사 인물처럼 보이던 박병호씨는 실제로 역사극에 많이 출연했습니다. 제가 처음 몽양 여운형의 사진을 보고서는 ‘어? 저승사자잖아!’라고 느꼈는데, 역시나 ‘새벽’(1985) ‘여명의 그날’(1990) 등에서 싱크로율 높은 여운형 역으로 출연했습니다. ‘찬란한 여명’(1995~1996)에선 개화파 지식인이지만 얄궂게도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 평안도 관찰사였던 박규수 역을 맡았는데,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본인이 내려 놓고도 몹시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복합적인 연기를 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가장 잘 알려진 역할은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1996~1998)에서 맡았던 무학대사 역이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함흥차사(실제 역사와는 차이가 있음)로서 이성계·이방원 부자를 화해하게 하고, 이성계에겐 “집착을 버리라”고 권했던 그 역할을 아직도 많은 시청자가 기억하고 있을 테죠. 당시 태조 이성계 역을 맡은 김무생씨가 상 위를 철퇴로 내리쳐 그릇이 부서지자 그 파편이 튀어 뺨에 맞았는데도 눈을 부릅뜬 채 계속 연기를 했다고 합니다. 연기 중엔 정말 본인이 무학대사라고 생각할 정도로 몰입했던 것 같습니다.

‘스님 전문 배우’라는 타이틀이 붙을 만큼 그는 ‘용의 눈물’ 말고도 숱한 드라마에서 승려 역할을 맡았습니다. ‘서궁’(1995)의 사명대사, ‘천둥소리’(2000)의 서산대사, ‘태조 왕건’(2001)의 형미대사, ‘천추태후’(2009)의 진관대사, ‘정도전’(2014)의 무학대사, ‘징비록’(2015)의 사명대사, ‘돈꽃’(2017)의 초연 스님 역을 거쳐 2019년 ‘시크릿 부티크’의 운산 스님 역 이후 그는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습니다. 워낙 고령이어서 이젠 은퇴했나 보다 여길 뿐이었죠. 실제로 경남 남해에 오래 전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현재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는 주인공 애순·관식 부부의 젊은 시절 셋방 주인이자 도동리 만물센타 주인인 ‘점방 하르방’이 등장합니다. 마치 숨을 쉬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고 시청자들은 ‘진짜 제주 사는 할아버지 아니냐’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저승사자잖아!”

실로 미수(米壽)의 나이에 박병호씨는 다시 드라마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비해서도 아주 마른 모습으로 말입니다. 겉으론 매우 까칠하면서도, 셋방살이하는 주인공 부부가 굶을까봐 몰래 조금씩 쌀을 챙겨 주는 다정한 마음씨를 지닌 역할입니다. 그런가 하면 초저녁에 먹을 것을 갖다 주려는데 불이 꺼지는 모습을 보고 심통난 표정을 짓기도 합니다.

돌이켜 보면 유신 말기 소시민을 도와주는 저승사자 역, 조선 초기 태조와 태종의 화해를 도왔던 무학대사 역에 이어 또 이렇게 은밀하게 주인공을 도와주는 속 깊은 역할로 출연한 것입니다. ‘폭싹 속았수다’가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에는, 이렇게 ‘어떻게 저 배역에 저 배우를 찾아냈지?’라며 감탄할 만큼 세심하고 탁월한 캐스팅의 디테일이 큰 몫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K드라마의 전통은 길고 깊은 것이겠죠.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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