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왼쪽)이 명동대성당 미사 후 휴전선 철조망으로 만든 가시관을 보며 설명을 듣고 있다. 유리 케이스를 든 이가 허영엽 신부. /허영엽 신부 페이스북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왼쪽)이 명동대성당 미사 후 휴전선 철조망으로 만든 가시관을 보며 설명을 듣고 있다. 유리 케이스를 든 이가 허영엽 신부. /허영엽 신부 페이스북

눈을 감고 생각하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환하고 따뜻한 미소가 먼저 떠오른다. 2014년 8월 교황님 방한 당시 나는 방한위원회 대변인이었다. 8월 18일, 교황님이 명동성당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마지막으로 4박 5일의 한국 순방을 끝내고 로마로 귀국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오전 9시 20분쯤 마지막 브리핑을 끝내고 서둘러 명동성당으로 뛰어갔다. 교황님은 막 도착하셔서 임시 제의실(祭衣室)로 사용하는 코스트홀 1층으로 들어가셨다. 수녀님과 복사(服事·미사에서 사제를 돕는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계셨다. 나에게도 성큼 다가오시더니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하셨다. 교황님의 손이 아버지의 손처럼 무척 크고 따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한국 사람들은 교황님을 특별히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자 살짝 웃으셨다. 교황님의 해외 순방 총책임자인 알베르토 가스바리 박사가 옆에서 “오랫동안 편지와 의견을 주고받았던 서울대교구 홍보 담당”이라고 나를 소개하자 고개를 끄덕이시며 무언가 잠깐 가스바리 박사에게 이야기하셨다.

가스바리 박사는 밖으로 나오면서 나에게 이야기했다. ‘신자들의 기도’ 때 교황님 자신이 다섯 번째로 어려움에 빠진 이라크를 위해 직접 기도하시겠다고 알려주었다. 미사 주례자인 교황님이 신자들의 기도를 직접 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미사를 시작하는데 준비하라고 하면 전례 준비하는 사람들이 당황해할까 봐 교황님이 직접 하신다고 한 것이라 짐작된다. 미사 때 맨 앞줄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앉게 한 것도 교황님의 뜻이었다. 교황님은 입장 때 위안부 할머니 한 분 한 분 손을 잡아주시며 위로해주셨다. 한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나비 배지를 건네자 그 자리에서 제의에 달고 미사를 진행했다. 그때 한 할머니가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어”라고 한 말씀이 기억난다.

2014년 8월 명동성당 미사 후 그림을 선물한 아기를 보며 활짝 웃는 프란치스코 교황. 아기를 안은 이가 허영엽 신부. /천주교 서울대교구

미사가 끝나기 전 교황님이 제의실로 가는 도중 한 꼬마를 안고 있는 어머니가 “교황님을 꼭 만나야 한다”고 내게 말했다. 아이는 TV에서 교황님을 보고 “교황 할아버지 진짜 보고 싶다”고 졸라서 새벽부터 명동성당 앞 대열 맨 앞에서 몇 시간을 기다렸다고 했다. 교황님께 드릴 그림 편지도 썼다고 했다. 그런데 미사 입장 때 교황님이 다른 쪽을 보면서 들어가시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며 아이가 울고 있다고 너무 간절하게 부탁을 하셨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제의실로 가서 기다렸다. 잠시 후 미사가 끝나고 들어오시는 교황님의 모습이 보였다. 4박 5일 일정을 마친 교황님은 너무나 지친 모습이었다. 꼬마는 내 손을 잡고 쪼르르 교황님 앞으로 걸어갔다. 손에 편지를 든 채. 교황님은 걸음을 멈췄고, 거짓말처럼 지친 기색은 싹 사라지고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띠셨다. 그런 미소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교황님은 아이를 안아주시며 축복해주셨다. 시간과 공간이 정지된 것처럼 아름다웠던 그 광경은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아이는 씩씩한 중학생이 되어 2023년에 로마로 교황님 행사에 참석하러 가기도 했다.

교황님은 민감한 사안도 늘 가스바리 박사를 통해 의견을 구하시고 즉각 지시를 해주셨다. 대부분 우리 측 의견을 이견 없이 다 받아주셨다. 교황님이 방문하신 첫날 청와대에서의 첫 연설 한국어 번역문에 오해가 있을 수 있는 단어 하나를 고쳐야 했는데 시간이 없었다. 기자들에게 배포하기 전 수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황님께 직접 허락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침 교황대사관에서 전화를 받은 가스바리 박사는 교황님과 대변인 롬바르디아 신부님, 세 분이서 긴급회의를 했고 우리에게 일임하기로 했다고 답이 왔다. 나중에 교황님이 “우리보다 그 사람들이 한국어는 더 잘 알잖아” 하셨다는 말씀을 롬바르디아 신부님이 전해주어서 함께 웃었다. 어느 작은 것 하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고 격려해주셨던 교황님의 따뜻함과 여유, 따뜻한 미소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