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서문교회 전경. 앞에 보이는 종탑은 1908년 순직한 전킨 선교사를 기념해 세운 것이다. 당시 미국 선교부는 직경 90Cm짜리 종을 제작해 태평양을 건너 전주로 보냈고, 서문교회 교인들과 이웃 교회들은 정성을 모아 이 종각을 지었다. 기념종은 1944년 일제의 공출로 빼앗겼고, 해방 후 국내에서 새로 종을 만들어 종각에 걸었다. 종각은 위치만 조금 옮겼을 뿐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김한수 기자

전주서문교회 입구에는 높이 7m에 이르는 목재 종각이 우뚝 서있다. 1908년 43세에 순직한 전킨 목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이 종각은 호남 최초 교회 서문교회가 겪은 기쁨과 슬픔, 고난과 영광의 역사를 지켜본 산 증인이다. 그 세월은 미국 남장로교 ‘선발대(pioneers) 7인’이 서문교회를 세우고 호남 복음화에 희생하고 헌신한 역사였다.

전주서문교회를 개척한 미국 남장로교 7인의 선교사 가족들. /전주서문교회

‘선발대 7인’의 결심을 이끌어낸 것은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였다. 1891년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언더우드의 강연에 감동받은 미국 남장로교 신학생들이 한국 선교를 자원한 것. 전킨 부부와 레이놀즈 부부, 테이트 남매 그리고 리니 데이비스 등 남성 3명, 여성 4명이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처음엔 인도 등을 선교지로 준비하다가 조선으로 바꿨다면, 선발대 7인은 처음부터 조선을 목표로 했다. 1892년 조선에 도착한 이들은 제주도를 포함한 호남 지방을 선교지로 맡았다. 이듬해 6월 자신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던 조사(助事) 정해원을 전주로 파견해 성문 밖 은송리에 예배처를 마련해 예배를 드린 것이 전주서문교회의 시작이다. 1894년 1월 테이트가 여동생 매티와 함께 전주로 내려와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서양 여성을 구경하기 위해 부녀자 수백 명이 낮밤으로 찾아오는 바람에 울타리가 무너질 정도여서 전도에 큰 도움이 됐다.

1911년 세워진 'ㄱ'자 형태 한옥 예배당. 'ㄱ'자로 꺾인 부분의 강대상의 좌우로 남성과 여성의 좌석을 구분했다. /전주서문교회

선교사들은 1905년 전주성 서문 밖으로 옮겨 교회를 세웠고, 전주천 건너 화산 언덕엔 학교(신흥학교·기전여학교), 병원(예수병원), 고아원을 세워 ‘기독교 타운’을 건설했다. 미나리꽝(밭)이나 공동묘지가 있던 버려진 땅은 기독교와 함께 신문물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변했다. 예수병원은 서울 세브란스병원, 대구 동산병원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자부심이 전주 사람들에게 퍼졌다. 선교사들은 교회와 학교, 병원을 무대로 서로 협력했다. 고전어 전문가로 외국어에 능통했던 레이놀즈는 서문교회 담임목사 시절 구약성경 한국어 번역을 마쳤다. 교회 창립 후 15년 동안 테이트, 레이놀즈, 전킨 등 남성 선교사 전원이 담임목사를 번갈아 맡을 정도로 총력을 기울였다.

전주 선교사 묘역. 선교사들이 활동한 신흥학교와 예수병원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안장돼 있다. /전주서문교회

영광 뒤엔 희생도 잇따랐다. 1년 동안 1800여 명을 전도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던 여성 리니 데이비스가 1903년 전염병으로 순직한 데 이어 1908년 전킨 선교사도 폐렴으로 사망한 것. 전킨은 이미 세 아들을 먼저 보낸 상태였다.

전킨 기념종은 이런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유복자를 뱃속에 품고 미국으로 귀국한 전킨 부인 메리 레이번 여사는 미국 선교부의 도움으로 지름 90㎝짜리 기념종을 제작해 서문교회에 선물했다. 종을 받은 교회는 교인들과 인근 교회들이 십시일반으로 정성을 모아 종각을 세웠다. 종각은 전주의 명물이었고 서문교회의 자랑이었다. 각각 예배 시작 1시간, 30분, 5분 전에 울리면서 정확한 예배 시각을 알렸다. 1944년 일제가 강제로 떼어 가기 전까지 전킨 기념종은 시간을 알리는 기준이 됐다. 해방 후 국내에서 새로 제작한 종은 2년 전까지도 매년 송구영신 예배 때 울려 퍼졌다.

교회는 세례 문답과 성경 공부를 한글 보급을 위한 기회로 삼아 문맹을 줄여나갔고, 축첩(蓄妾)·간음·술장사 등을 고치지 않는 교인은 가차 없이 교회에서 쫓아내면서 폐습을 개선해 나갔다. 1909년 4월 성경 공부엔 545명이 참석할 정도로 공부와 신앙의 열기는 높아갔다. 교인이 늘어나자 교회는 자진해서 흩어지는 분립(分立)에 앞장서 남문교회·용흥리교회·전주중앙교회·전주동부교회·전주서신교회 등을 세웠다.

1920년대 기전여학교 학생들이 서문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줄지어 언덕을 내려오는 모습. /전주서문교회
1920년대 전주 신흥학교 학생들이 전주서문교회 주일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줄지어 다리를 건너는 모습. /전주서문교회

신앙의 씨앗은 민족정신으로 꽃피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김인전 담임목사는 전주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일경의 추적을 피해 상해로 망명할 정도였다. 1937년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하던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는 폐교됐다. 학교가 폐교되면서 주일 예배 때면 기숙사에 있던 두 학교 학생들이 줄지어 언덕을 내려와 다리 건너 교회로 오던 장관이 사라졌다. 1937년 9월 26일 주일 예배 일지에는 ‘신흥·기전 학생 전무(全無)’라고 기록돼 있다.

전주서문교회 교인으로 걸인과 고아 등 어려운 이들을 돌본 '거리의 성자' 방애인(왼쪽)과 이보한. 이보한의 사진은 1929년 조선일보에 소개된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 /전주서문교회, 조선DB

교인들 가운데 ‘거리의 성자’라는 이들이 배출된 것도 서문교회의 자랑. 1929년 10월 2일 자 조선일보는 ‘먹던 밥을 나누고, 입던 옷을 벗어주는, 걸인에게 둘도 없는 동정자(同情者)’라며 이보한(1872~1931)을 소개하고 있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라는 찬송을 부르며 거리 전도에 나서 ‘이(李) 거두리’란 별칭으로 유명했던 그가 사망했을 땐 걸인과 고아, 기생, 나무꾼 등이 대거 장례에 참석했다. 기전여학교 교사였던 방애인(1909~1933) 역시 고아와 걸인을 돌보다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배은희 담임목사는 ‘조선 성자 방애인 소전(小傳)’이란 전기를 통해 방애인의 삶을 기렸다.

호남 지역 교회들이 자료를 문의하고, 3·1운동 당시 이 교회 장로를 지내고 행방을 알 수 없는 집안 조상의 사진을 구하기 위해 외국에 거주하는 교포가 찾아오는 것도 서문교회의 위상을 보여준다.

1980년대엔 2000명에 이르던 주일 예배 출석 교인은 지금은 약 600명 정도. 인구 감소와 도심 공동화의 영향을 받았다. 규모는 줄었지만 지금도 5대째 출석하는 가정이 드물지 않은 서문교회 교인들은 ‘호남 첫 교회’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김석호 담임목사는 “선교사님들이 세운 교회인 만큼 ‘선교의 빚’에 대한 의식이 교인들 사이에 확고하다”며 “지금도 교회 재정의 3분의 1은 반드시 선교에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