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 미사가 지난 26일 엄수됐고, 로마 시내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서 매장 절차까지 마무리되었습니다. 외신을 통해 전해진 교황 묘소 사진이 또 다시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단정한 무덤엔 라틴어로 ‘프란치스쿠스’라는 글자만 새겨져 있고 흰 장미꽃 한 송이가 놓여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교황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사진이 아닌가 합니다.
교황 선종 이후 이런저런 자료를 뒤적이다 색다른 다큐 한 편을 발견했습니다. OTT 디즈니+ 채널에서 서비스 중인 2023년 다큐 ‘아멘:교황에게 묻다’입니다. 원제는 ‘Amen:Francisco Responde(아멘:프란치스코 교황이 답하다)’이고요.
다큐는 스페인, 세네갈, 아르헨티나, 미국, 페루 등 다양한 나라에 사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젊은이 10명이 로마로 찾아와 교황을 만나 자유롭게 대화를 나눈 내용입니다. 참가자들의 종교는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 이슬람,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등 다양합니다. 다만 언어는 모두 스페인어를 사용하더군요.
다루는 내용은 매우 도발적입니다. 낙태, 동성애, 가톨릭 학교에서의 아동 성추행, 여성 사제 허용 문제, 포르노까지 대화의 주제로 올랐습니다. 교황이 이런 주제를 다루는 것을 알고도 촬영에 응했는지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청년들은 ‘돌직구’를 마구 던지더군요.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주제로 도발하는 청년들에 대한 교황의 답변 태도였습니다. 심지어는 교황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말을 끊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거든요. 교황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자신이 말을 하고 있는 도중에 끊고 들어오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요. 그런데 교황은 훅 들어오는 질문도 너그럽게 용인하더군요. 그리고 말하다가 감정이 복받쳐서 울먹거리는 참가자에게는 ‘충분히 감정을 표현하라. 울어도 좋다’면서 울먹임이 멈출 때까지 기다려줬습니다.
몇몇 장면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날 교황은 지팡이를 짚고 약간 절뚝이는 걸음으로 대화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잔뜩 기대를 품고 “의전이 복잡할 거야”라고 지레짐작하면서 조용히 그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교황의 첫마디는 “왜 이렇게 조용해요? 누구 죽었어요?”라는 농담이었지요. 이어서 스마트폰을 쓰느냐, 봉급은 얼마나 받느냐 등의 개인적인 궁금증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녹였지요. 교황은 “봉급은 받지 않는데 먹는 건 다 공짜다”라며 “중산층이나 중하층 노동자와 비슷한 생활 수준으로 산다”고 말하지요. 그리고 “휴대전화는 30년 전 주교가 될 때 신발만 한 크기의 것을 선물받은 적 있는데 지금은 쓰지 않는다”고 답했지요. “나는 좀 옛날 사람”이라면서요. 휴대폰은 쓰지 않지만 소통은 중요하게 여긴다면서 이날의 본격 문답이 시작됐지요. 흔히 고위직이 간담회를 하게 되면 각 분야의 실무자들이 배석해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선 대신 대답을 하곤 하지요. 교황과 청년의 대화에선 그런 모습은 없었습니다. 교황은 배석자 없이 1대10으로 마주했습니다. 교황 탁자엔 물병과 컵 하나만 놓여 있었습니다.
첫 질문부터 돌직구였습니다. “교회가 시대착오적이거나 구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교황은 “교회는 주변부, 교외, 변두리로 가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현실, 빈곤의 문제 등을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때까지는 부드러운 편이었습니다.
이민자 문제에서 첫 스파크가 튀었습니다. 인도 이민자 가정 출신의 젊은이가 인종 차별과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교황이 약간 실수(?)했거든요. 아르헨티나 인구 4600만 중 원주민은 60만밖에 안 되기 때문에 이민자는 특혜를 받았고, 문화의 혼재는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이야기하는 도중에 세네갈 젊은이가 손을 번쩍 들었죠. 교황은 “말하고 싶어요?”라고 물었고 청년은 자기 친척 케이스를 들면서 “14살짜리 소년이 8일 동안 이민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스페인으로 향한다.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도착한 후에 자기는 현지인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경찰 검문을 받으면서 또 그런 사실을 체감한다. 여권으로 자신의 앞날이 결정된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묻습니다.
진지하게 듣고 있던 교황은 ‘현대판 착취’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이민도 1등급, 2등급이 있는 것 같다. 고통받는 우크라이나인들은 비교적 대접받는 반면, 아프리카인들은 여전히 박대당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때에만 환영한다”는 태도는 이기적이라며 “난 널 이용한다. 친구로서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태도는 이민자를 노예로 보는 것이라고 하지요.
낙태 문제에서도 곤혹스러운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낙태 경험을 한 여성을 돕는 활동을 하는 한 가톨릭 여성이 “교회는 왜 여성의 권리를 막느냐”고 물었을 때 교황은 ‘과학적 설명’을 시도했다가 또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수정 후 1개월이면 DNA가 정렬되고 장기도 생성되기 시작한다며 ‘문제 해결을 위해 인간 생명을 없애는 게 정당한가, 청부살인...’이라고 말할 때 질문을 했던 여성이 말을 끊고 치고 들어왔지요. “여성들이 그런 결정을 가볍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요.
그다음 상황은 교황과의 문답이 아니라 청년끼리 격렬한 논쟁이었습니다. 매주 낙태가 이뤄지는 병원 앞에서 낙태를 하려는 여성을 설득하는 활동을 하는 한 여성이 나서면서였죠. 교황은 고개를 양쪽으로 번갈아 돌려가며 그들의 논쟁을 중간에서 경청하다가 마지막에 이렇게 정리하지요. “여러분 대화의 섬세함이 좋다. 수학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다. 낙태한 여성을 홀로 두지 말고 함께해야 한다. 그들을 고립시키거나 냅다 지옥으로 보내선 안 된다. 다만 사실을 말해야 한다. 곁에 있는 것과 그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입술을 바르르 떨던 한 남성은 가톨릭 초등학교에서 교사에게 당한 성폭력을 고발하지요. 가해자는 지방법원에서 11년형을 받았지만 어떤 이유인지 2년형으로 감형됐고, 결국 수감되지도 않고 그 학교에서 그대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답니다. 청년의 아버지는 교황에게 편지도 썼다지요. 신앙교리성에서는 “교사의 명예는 회복될 것”이라는 편지를 받았답니다. 청년은 “최종 결정이 남았는데 교황의 생각은 어떤가”라고 묻습니다.
교황은 “미성년자 학대 사건에는 시효가 없다”며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곳에서 다치게 한 것이고 가해자가 교회 사람이라면 위선과 이중생활은 끔찍하다”면서 “최종 판결이 남았으니 재검토하고 싶다. 그건 믿어도 된다”고 말하지요. 그러자 다른 참가자는 재검토하겠다는 교황의 말에 대해 “피해자는 문제 해결을 약속받으려고 이 자리에 왔다”며 반발하기도 하지요. 교황은 “이 문제는 지금 시작된 것이 아니고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답합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교황 아래에는 나쁜 사제와 주교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한다”고까지 합니다. 교황은 “알고 있다”며 “내 방침은 ‘청소’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신고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전체적으로 교황을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의 연속이지요.
또 다른 난제는 ‘여성 사제’ 문제였지요. 앞서 낙태 문제를 제기한 여성 참가자가 ‘교황님 자리에 여성이 있는 걸 상상해본 적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질문은 ‘성차별이 아니냐‘는 것이었지만 교황의 답은 신학을 바탕으로 한 ’성 역할 구분론‘이었습니다. “성직은 남성을 위한 것인데, 훨씬 중요한 어머니 역할은 여성을 위한 것이다. 교회 자체가 명사로 여성형이다. 교회는 예수의 남편이 아니라 아내이다. 성직자 계통의 승진하려는 욕망의 이면에는 남성성에 충실한 것이 깔려있다...” 그러나 질문자는 다시 “교리문답을 비롯해 여성들이 교회 내에서 여러 역할을 다 하고 있다. 왜 신부가 못 되나”라고 재차 질문했고 교황은 다시 한 번 여성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성직자가 비성직자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지요. 다른 대부분 문답에선 참석자들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성 사제, 여성 성직 문제에 대한 대화에 관해서는 교황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표정이 그대로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이런 장면은 녹화 후에 편집할 수도 있었을 법도 한데 그대로 다큐에 노출됐습니다.
이날 교황은 여러 차례 “난 옛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젊은이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점도 많았겠지요. 또 모든 주제에 대해 젊은이들을 설득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교회에 대한 불만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청년들 사이에 혼자 뛰어들어 대화하고 설득하려는 그 모습 자체가 그의 용기를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딪혔을까요, 또 자신을 적대시하는 사람들 사이에 뛰어든 적은 얼마나 많을까요. 그는 어려운 상황도 피하지 않고 항상 최선을 다해서 상대의 주장을 들으려 했고, 설득하려 했지요. 미소를 잃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면서요.
대화를 마칠 때 교황은 “여러분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며 “고맙다”고 합니다. 그는 “각자의 관점이 있고 거기엔 거리도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형제”라면서 “관념을 두고는 논쟁할 수 있지만 형제애에 관해서는 아니다”라고 말하지요. 그러면서 “계속 나아가세요. 삶은 아름다워요. 삶이 열매를 맺도록 도와야 해요”라고 말합니다.
이날 대화에서도 교황은 몇 가지 기억에 남을 어록을 남겼습니다.
“하느님은 누구도 거부하지 않아요. 누구든 교회에서 쫓아낼 권리가 없어요. 누구든 환영하는 것이 내 임무입니다.”
“나는 사제들에게 낙태를 하고 찾아온 여성에게는 질문하지 말고 자비로워지라고 조언합니다. 예수님처럼. 예수님은 모두를 환영합니다.”
“우리는 형용사 문화에 빠져 있어요. 우리는 형용사를 통해 모든 걸 상대적으로 만들고 그걸 쌓아올려요. 형용사는 세례를 받지 않지요. 명사는 (세례를) 받고, 사람들은 받아요. 저는 사람들을 믿어요.”
“(교황은 외로운 적 없느냐는 질문에) 나도 외로운 적 있지요. 고독은 인생의 겨울과 같아요. 말하자면 흐린 날씨에는 경로를 바꾸면 안 돼요. ‘난 잘못됐어, 괜찮지 않아’ 멈추고 겨울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그런 다음 자신이 바뀔지 생각해야 돼요. 그럴 땐 대화가 큰 도움이 돼요. 내 경험을 말하자면 최악의 시간도 결국엔 더 나은 삶을 위해서였어요.”
대화 중에 나온 “누구든 환영하는 것이 나의 임무” “곁에 있는 것과 그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다르다” 등의 발언은 사제로서 그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비록 교리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지만 항상 모든 이를 환대하고 그들의 곁에 있어주려 애썼던 사제.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런 분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다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