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째, 서울 광화문 한복판은 시침질 잘못한 누더기 원단처럼 곳곳이 난장판이다. 권한대행 체제의 서울시(市)가 지난해 11월부터 예산 791억원을 들여 토목 공사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광화문광장 서쪽(세종문화회관 쪽) 편도 6차선 도로를 없애 광장 면적을 넓히고, 동쪽(주한 미국대사관 쪽)에 왕복 7차선 도로를 만드는 중이다. 4·7 보궐선거를 불과 5개월 앞두고 벌어진 ‘치우친 광장’ 공사에 도로 모양도 점점 조잡하게 바뀌고 있다.
광화문에서 조금만 더 걷다 보면, 지난 2017년 사업비 600억원이 들어간 서울역 공중정원 ‘서울로7017’이 나온다. 당초 서울시는 미국 뉴욕 ‘하이라인 파크’처럼 도심의 대표 명소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만간 새 서울시장이 당선되면, 세금으로 또 뭔가를 뜯어 고칠 것이 분명하다. 아, 불안함은 왜 항상 우리의 몫인가.
[기사보기] 朝鮮칼럼·The Column 광화문 광장병(病)
선거일이 가까워지자, 시장 후보들이 조건 반사처럼 포장마차에서 어묵과 떡볶이, 호떡과 찐빵을 사먹기 시작했다. 스티브 잡스 풍 프레젠테이션, 줌(zoom) 화상회의 시스템을 활용한 유튜브 방송도 쏟아진다. 그저 묻고 싶은 건 이것 하나인데. “서울의 주인은 대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도시의 품격을 고민하는 당신에게
먹고 살기 바쁜 세상, 이따금 메트로폴리스의 품격에 대해 고민했던 사람(다른 말로는, 지자체 무능 행정에 분노해 본 사람)들을 위한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새로 나왔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52년째 거주 중인 일흔 한 살 ‘프로불편러’ 작가 프랜 리보위츠가 일흔 아홉의 ‘거장’ 영화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를 만나 뉴욕의 삶을 논하는 작품이다. 넷플릭스는 최근 두 사람의 대담·강연을 담은 시리즈 ‘도시인처럼(Pretend It’s a City)’을 공개했다. 한 편 당 30분 분량으로 모두 7편이다.
다큐 형식을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다. 입담 센 글쟁이 할머니가 뉴욕에서의 삶, 문화, 예술, 부동산, 패션, 돈, 건강, 기술 발전 등 삼라만상(森羅萬象)에 대해 떠들면, 거장 감독이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배치된 ‘웃음 지뢰’를 밟고 파안대소(破顔大笑)한다. 중간 중간 할머니가 뉴욕시(市)를 향해 디스(diss·힙합에서 상대를 비난하는 것)하는 내용이 흥미롭다.
모두가 숨가쁘게 지나가는 맨해튼에서 할머니는 남들과 다른 속도로 걷고, 남들과 다른 곳을 바라본다. 어딘가 잔뜩 짜증이 난 것 같으면서도, 이미 반쯤 체념한 표정이다. 취미는 보도 블록에 깔린 동판 장식을 구경하는 것. 종종 주변을 살피지 않고 돌진하는 자전거를 향해 시원하게 손가락 욕도 날린다. 할머니의 장래 희망은 뉴욕시장이다.
스코세이지가 리보위츠의 이야기만으로 다큐멘터리를 찍은 건 2010년 ‘퍼블릭 스피킹(Public Speaking)’ 이후 이번이 두 번째다. 웬만한 ‘스탠드업 코미디 쇼’보다 재밌다. 우습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도시 문명을 이끌어 온 ‘소프트 파워’에 대해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서울시장 후보 없나
할머니의 촌철살인에 뉴요커들은 환호한다. 이 괴짜 할머니가 시장이라면, 잃어버린 광장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리보위츠는 1970년대 앤디 워홀이 창간한 잡지 ‘인터뷰’의 기자였고, 1978년 유머 넘치는 수필집 ‘메트로폴리탄 라이프’를 출간해 유명세를 탔다. 뉴저지의 한 고등학교에서 퇴학 당한 뒤, 1969년 뉴욕으로 건너와 지금까지 쭉 맨해튼에서 살고 있다. 택시 기사, 청소부 일로 돈을 벌다 스물 한 살 무렵부터 글을 썼다.
그는 타고난 유머와 재치, 언변으로 단숨에 스타 작가가 됐다. 리보위츠가 1978년 뉴스위크에 기고한 칼럼 구절인 ‘말하기 전 생각하고, 생각하기 전에 읽어라(Think before you speak. Read before you think.)’는 지금도 머그컵·가방에 인쇄돼 팔리는 중이다.
리보위츠가 구사하는 ‘일상 언어’의 힘이 굉장히 놀랍다. ‘헬게이트’나 다름 없는 지하철, 지리도 제대로 파악 못한 자격 미달 운전 기사, 천정 부지로 치솟는 월세, 사라지는 서점과 신문 가판대, 살살 녹는 내 세금…. 서울 시민도 격하게 공감할 부동산 투자 실패담이 눈물겹게 들린다.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다큐에선 리보위츠가 뉴욕 길거리를 걷고,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기다리거나, 도서관에 가는 장면이 계속해서 나온다. 무질서하게 바뀌는 도시에서 문화 자본을 지켜낸 건 엉터리 행정가나 두바이 뺨치는 마천루가 아니다. 평범한 일상을 비범하게 살아가는 시민의 품격이다.
리보위츠는 뉴욕에서 자잘한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지독하게 힘든 일인지 시종일관 투덜대지만, 삶의 터전인 뉴욕을 떠날 수는 없다. 엉망진창인 도시를 제대로 돌려놓기 위해 뉴욕시장이 되고 싶다는 그녀. “그렇게 ‘빡센’ 도시에서 살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이들에겐 이렇게 위로한다.
‘헬(hell)뉴욕 산증인’의 반(半)백년 생존기는 삶이 버겁고, 불안한 도시인을 향한 응원처럼 들린다. 다큐를 보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도시의 주인은 시민, 애초부터 시장에게 많은 걸 바라지도 않았다.’
[기사보기] 프랜 리보위츠, “뉴욕 서점 스트랜드, 제발 랜드마크 지정하지마”
[기사보기] ‘도시인처럼’에 나오는 리보위츠 단골 서점, 스트랜드의 기적
개요 다큐멘터리 시리즈 l 미국 l 30분·7편
등급 15세 관람가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
특징 유머감각, 공감능력, 통찰력
※'기사보기’와 ‘바로보기’ 클릭은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 작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