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늦기 전에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눌러 담은 그리운 인생의 참맛”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난 잡초, 바위 위를 덮은 이끼, 무심하게 지나치던 나뭇가지까지 그의 손을 거치면 다 ‘밥’이 됐다. 자연에서 온 모든 것으로 사람과 그 인연의 정(情)이 켜켜이 담긴 밥을 만들어내던 방랑식객 임지호(65)가 지난 12일 너무도 황망히 우리 곁을 떠났다.
그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밥정’이 사무치게 다가온다. 사람 냄새가 이토록 절실히 묻어나는 영화를 찾기 어렵다. 그의 부고(訃告)를 접한 후 다시 본 밥정은 더욱 가슴을 시리게 했다. 소중한 사람은 떠났지만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했던 밥 한 끼의 의미, 소중한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의 의미는 더 오래도록 우리 가슴 속에 남을 것 같다.
◇백종원 류의 실용적 요리사와 전혀 다른 고독한 셰프
고(故) 임지호 선생은 고독한 셰프다. 유명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열렬한 팬이 많지만 대중적인 인기가 돋보이지 않는다. 레시피도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재료와 조리법을 계량하지도, 설명해주지도 않는다. 그가 구해오는 자연 속의 재료도 쉽사리 따라하기 어렵다.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백종원 류의 실용적 요리법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그는 성장기부터 고독했다. 손 귀한 한의사 집안의 2대 독자로 태어났지만 알 수 없는 역마살에 홀린 듯 열두 살에 집을 나와 전국을 떠돌았다. 여기저기 식당에서 먹고 자는 걸 해결하며 배달 일을 했고, 어깨너머로 음식을 배워, 밤잠을 참으며 음식 연습을 했다. ‘음식을 만들 때 마음이 가장 편하다’는 걸 깨닫고 요리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식당 한 곳에 오래 있지 못하고 전국을 떠돌며 우리 땅에서 나는 재료들로 ‘이 세상 최고의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2000여명 노동자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총주방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그 흔한 요리학교 졸업장 하나 없고, 특급호텔 셰프들의 도제식 제자가 된 적도 없지만 그가 개척한 자연요리는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2003년 미국 뉴욕 UN본부에서 열린 한국 음식축제, 이듬해 캘리포니아 사찰음식 퍼포먼스, 2005년 독일 슈튜트가르트 음식 시연회, 2008년 일본 도쿄 긴자 한국의 자연요리 퍼포먼스, 2013년 터키 이스탄불 힐링푸드쇼 등에서 자연요리를 선보였다. 미국 음식 전문잡지 ‘푸드 아트’(FOOD ARTS)의 2006년 12월호에 커버스토리로 게재되기도 했다. 지난 2017년 7월에는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기업인 호프 미팅에서 황태절임 등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그의 삶과 음식은 TV 다큐,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됐다. ‘잘 먹고 잘 사는 법-식사하셨어요’, ‘인간극장’, ‘힐링캠프’ 등에 출연했고, 최근엔 ‘더 먹고 가(家)’라는 프로그램에서 유명인들을 초청, 힐링 음식을 만들어 주고 대화하며 정을 나눴다.
이런 프로그램들을 통해 그의 음식과 철학을 읽을 수 있지만 백미(白眉)는 영화 ‘밥정’이다.
◇3일 밤낮을 세워 만든 108가지 음식
영화는 세 어머니에 대한 얘기가 뼈대를 이룬다. 어릴 때 별세한 줄도 모르고 이별한 친어머니, 마음으로 길러 주셨지만 임종(臨終)을 하지 못한 양어머니, 그리고 길에서 만난 어머니다. 자신을 낳아주신 생모가 세 살 때 자신을 아버지에게 맡기고 돌아가던 길에 교통사고로 별세하셨다는 얘기를 성년이 돼서 알게 된다. 아픈 사연을 간직한 그는 길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자연에서 얻은 식재료로 기꺼이 음식을 대접한다.
지리산에서 만난 김순규 할머니를 길 위의 어머니로 10년 간 모시지만, 끝내 세 번째 이별이 찾아온다. 임지호가 지리산을 찾아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세 명의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3일 동안 108가지 음식을 장만한다. 이 대목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 함께 밥과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하동 지리산 자락의 사계(四季)가 보여주는 유려한 영상미, 바닷가 절벽을 기어 오르고, 눈썹이 하얘지도록 설산을 헤매는 모습 등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지는 장면이 시선을 붙든다. 고도의 절제미도 돋보인다. 세계 음식 박람회에서 작은 뻘게가 산을 기어오르는 듯이 만들어낸 요리 같은 화려한 장면은 감칠맛 날 만큼 간단히 처리된다. 그래서 여운이 더 깊다.
캐나다 핫독스영화제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된 이후, 스페인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음식영화 부문 등 다수의 영화제에 출품돼 호평을 받았다. 영화제의 호평들보다 이 영화를 본 일반인들의 평에 더 눈이 갔다. 임지호 셰프를 다시 볼 수 없게 됐다는 것이 더 아쉬워진다.
“밥 한 끼의 의미, 어머니의 의미, 소중한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의 의미. 사람 냄새 나는 영화.”
“엄마가 살아계심과 누구에겐가 상을 차려드릴 수 있다는 위안과 힐링, 희망을 선물 받은··. 눈가가 촉촉해졌던 시간.”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음식으로 꽃 피어나고, 상처로부터 아름답게 피어난 꽃을 보았다. 인간의 본질, 마음에 깊숙하게 와 닿는 영화.”
개요 다큐멘터리 영화 l 한국 l 2020 l 1시간 22분
등급 전체 관람가
특징 사람과 인연, 함께 나눌 수 있는 음식의 소중함이 절절히 느껴지는 영화
평점 네이버 관람객 평점 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