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 히어로물’은 본디 양지로 나오지 못하던 하위 문화의 마니아 장르. 하지만 마블 어벤져스 시리즈는 그걸 지금 시대의 가장 지배적인 서사 유행으로 바꿔놓았다. 이젠 영화에도 드라마에도 초능력 수퍼 영웅이 차고 넘쳐 익사할 지경이다.
대중이 슬슬 ‘정의의 수퍼 영웅’을 지겨워하는 듯한 낌새, 돈냄새에 민감한 할리우드 제작사들이 놓칠리 없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면 원래 있던 걸 바꾸면 될 일. OTT엔 익숙한 이야기를 비틀고 변주한 수퍼 히어로 시리즈들이 꽤 있다. 대중적 인기 뿐 아니라 비평적 평가도 높았던 작품으로 골라본, 우리들의 일그러진 수퍼 영웅 이야기.
◇'리전’ (디즈니+) :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진다
울버린, 프로페서X, 매그니토, 스톰, 미스틱…. 영화 ‘엑스맨’ 시리즈에서 ‘뮤턴트’라 불리는 돌연변이 초능력자들은 저마다 깊은 사연과 그로 인한 약점 혹은 결점을 갖는다. 뮤턴트들은 그 사연과 결점들 때문에 더 매력적이다.
디즈니 계열 FX 채널에서 세 개 시즌이 방송됐고, 모두 평단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마블 드라마 시리즈. 정신 감응 능력자인 프로페서X의 아들이자 마블 코믹스 엑스맨 세계관에서 최강의 안티 히어로 중 한 명인 ‘데이비드 할러’, 속칭 ‘리전’의 이야기다. 물론 엑스맨 세계관 따위 몰라도 드라마를 보는 데는 아무 상관 없다.
데이비드는 어릴 적부터 머리 속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들었다. 조현병(정신분열증) 진단을 받고 정신병원에 갇혔다. 그가 몸이 닿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아름다운 여자 ‘시드 배럿’을 우연히 만나며 기묘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 초현실적 난장판은 진짜 현실일까 아니면 병든 머리 속의 환상일까. 사라진 줄 알았던 시드와 재회해 뮤턴트들의 피난처 서머랜드로 간 데이비드는 자신의 기억을 거슬러 진실의 뒤를 쫓는다.
신약성서엔 예수가 사람 안에 깃든 마귀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묻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귀는 “군대입니다”라고 답한 뒤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 강물로 뛰어든다. 이 ‘군대’가 ‘리전(Legion)’이다.
◇'더 보이즈’ (아마존프라임비디오) : 정의도 양심도 온데간데없이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는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이 프라임 회원들에게 제공하는 비디오 서비스 개념으로 출발했다. 아마존 프라임 회원을 모두 구독자로 본다면, 구독자수 2억명으로 넷플릭스 다음 가는 세계 2위 OTT 서비스다.
‘더 보이즈’는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가 그동안 내놓은 히트작들 중 흥행이나 평가 양 측면에서 모두 첫 손에 꼽히는 시리즈. 유혈이 낭자하고 성인용 농담이 난무하며, 물신주의 배금사회의 어두운 면을 정면으로 풍자한다. 진정한 19금(禁) 수퍼히어로물이다.
‘세븐(The Seven)’은 정의를 바로 세우고 악을 제거한다고 알려진 수퍼 히어로이자 수퍼 스타들. 캡틴아메리카와 수퍼맨을 합쳐 놓은 듯한 ‘홈랜더’, 아쿠아맨 같은 수중 능력자 ‘딥’, 금강불괴의 투명인간 ‘트랜스루슨트’ 등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능력자들이다.
이들에게 히어로 활동은 거대 매니지먼트 기업 ‘보우트’에 소속돼 천문학적인 돈을 손에 벌어들이는 비즈니스이기도 하다. 영화나 예능에 출연하고, 특정 도시에 히어로를 출장 보내는 대가로 거액을 받는다. 폼나는 일을 하고 다니는 동안 피해자들이 속출하지만, 겉보기 화려함에 눈이 먼 대중도, 돈과 권력으로 결탁한 지배 체제도 히어로들의 악행에 눈감고 있다.
평범한 전자제품 판매사원 ‘휴이’는 ‘세븐’ 멤버인 고속 이동 능력자 ‘A트레인’이 저지른 일종의 교통사고로 눈 앞에서 여자친구가 산산조각 나는 비극을 겪는다. 말도 안 되는 변명과 헐값의 보험료로 얼렁뚱땅 넘기려 드는 수퍼 히어로들. 휴이는 히어로들의 악행을 폭로하려는 전직 CIA 요원 ‘빌리 부처’와 엮이고, 각자 히어로들에게 원한이 있는 민간인들이 모여 짠내나는 복수를 시작한다. 이들이 시즌1 막판에 이르러서야 갖게 되는 이름이 ‘더 보이즈’다.
◇'엄브렐러 아카데미’ (넷플릭스) : 지구 따위 수백번이라도 구해 주지
1989년 10월 1일 정오, 세계 곳곳에서 임신할 이유가 없는 여성 16명의 배가 갑작스레 부풀어 오르며 아이들 16명이 태어났다. 각자 서로 다른 초능력을 가진 수퍼 영웅이 될 아이들. 운명을 예감한 억만장자 하그리브스는 세계를 돌며 이들을 입양했다. 시즌1과 2에서 수차례 지구 멸망을 막아낸 좌충우돌 초능력 남매들,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시작이었다.
각자 결점과 상처를 가진, 어딘가 많이 모자라는 영웅들의 엉망진창 모험담으로 골수팬을 양산했던 이 시리즈가 세번째 시즌으로 돌아왔다. 1화는 서울 지하철 안. 교복 차림의 귀여운 남녀가 횡액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괴팍한 양아버지 하그리브스가 한국서 태어난 아이를 입양하겠다며 또렷한 한국어 발음으로 “얼마를 원해?”라고 말하면 웃음을 참기 어렵다.
고된 시간 여행을 거쳐 하그리브스 저택으로 돌아온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남매들은 이 시간대에선 아버지가 자신들이 아닌 다른 아이들을 입양해 ‘스패로우 아카데미’라는 별도의 수퍼 영웅 형제단을 조직했다는 걸 알게 된다.
일단 수퍼 영웅만 기본 10명이 넘는다. 각자가 가진 저마다의 배경에다 반복된 시간 여행으로 시간대까지 꼬이면서 이야기는 혼란을 더해 간다. 남매들 중 일부가 죽어나가고, 엄브렐러 남매들의 엄마들에게 일어난 사건을 파헤치고, 뜻밖의 몬스터와 싸우는 도중에 우주는 점점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 이제 이 배배 꼬인 상황을 바로잡고, 또 다시 예정된 멸망으로부터 세계를 구해야 할 시간이다. 이 정신없는 혼돈이야말로 엄브렐러 아카데미 시리즈의 진짜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