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살 때 소비자들이 고려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디스플레이 크기다. 요즘은 고화질, 나아가 초고화질 콘텐츠가 점점 늘어나 전보다 커다란 TV를 사려는 이들이 많다. 이마트에 따르면 올해 TV 전체 매출은 23%가 늘었는데 75인치 TV는 약 90%가 더 팔렸다.
TV는 당연히 화면이 클수록 비싸다. 그런데 TV 가격을 보면 화면 크기에 비례해서 값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커지면서 가격이 엄청 가파르게 비싸진다. LG전자 LCD TV의 2020년 모델을 보면 55인치 가격(약 260만원)에 비해 65인치 TV 가격은 65%, 77인치는 4배 이상 비싸다. 65인치·77인치의 화면 크기(면적)가 55인치보다 각각 40%, 96% 정도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격의 가속도‘가 심하단 느낌이 든다. 삼성전자 QLED의 경우도 비슷하다. 55인치(가격 105만원)보다 65인치는 78%, 75인치는 137%, 85인치는 347% 더 비싸다. 왜 그럴까. 그 답 안에 최근 나오는 굵직한 디스플레이 관련 뉴스를 ‘해독’할 열쇠가 들어 있다.
◇커질수록 가속도 붙는 TV 가격… ‘자투리' 비용도 영향
TV 제조사들은 가격을 책정할 때 여러가지 요인을 고려한다. 여기엔 TV 화면을 만들 때 필요한 유리의 원가도 포함돼 있다. 제조사는 TV 화면을 제작할 때 유리 원판을 사이즈에 맞게 잘라서 쓴다. 가죽 신발을 만들 때 커다란 가죽을 오려서 여러 켤레를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현재 쓰이는 유리 사이즈는 2200㎜ × 2500㎜ 크기며 업계에서는 이를 8세대라고 부른다. 이 패널은 49인치나 55인치(685㎜ × 1218㎜) 등의 TV를 만드는 데 최적화돼 있다. 예를 들면 원판을 49인치 TV 8개나 55인치 TV 6개분으로 나누면 남는 유리 거의 없이 TV가 나온다. 식재료를 살 때 어떤 요리를 만들지에 따라 분량을 결정하듯이, 잘 팔린다고 판단되는 TV 사이즈에 최적화해 원판 크기를 정했다고 보면 된다.
8세대 원판을 쓰면 TV 크기가 커질 때마다 버리는 유리의 면적이 늘어난다. 65인치 TV를 만들면, 같은 사이즈 원판에서 3대가 나온다. 이 경우 원판의 37%는 자투리로 남아 버려야 한다. 75인치(혹은 77인치)는 더하다. 두 대밖에 만들 수가 없다. 이 경우엔 버려야 할 유리가 전체 원판의 43%로 늘어난다. 자투리가 전체의 10분의 4가 넘어갈 정도로 커져버리는 것이다. 소비자가 내는 TV 가격엔 이 버리는 유리분의 비용까지 포함돼 있다. 그 결과가 바로 ‘커질수록 급격히 늘어나는 TV 가격’이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유리 원판 크기를 적절하게 바꿔 낭비를 막을 수는 없을까. 회사 규정을 이유로 익명을 요구한 한 디스플레이 업계 A씨의 설명이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TV 크기가 커질수록 원판의 크기도 커져 왔다. 최근 TV는 거거익선(클수록 좋다)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60인치대 이상 TV가 인기를 끌고 있는데, TV 업계는 이를 유리 사이즈가 커질 요인이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즉 75인치 TV가 인기를 끈다면, 이 크기의 TV를 만들 때 자투리가 가장 적게 나오도록 원판 크기를 바꿀 요인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대형 TV에 유리한 10.5세대, 관건은 ‘소비자 취향’
이런 이유로 LG디스플레이는 한동안 ‘대세’였던 8세대보다 크기가 큰 10.5세대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10.5세대 생산 라인(경기도 파주) 구축에 지난해에만 3조원이 넘는 투자를 했다. 10.5세대는 원판 크기가 2940㎜ × 3370㎜로 8세대보다 면적이 1.8배 크다.(한 세대 위로 인정받으려면 보통 면적이 1.5~2배 정도 늘어야 한다.) 이 사이즈에선 55인치형 패널이 8개, 65인치는 8개, 75인치는 6개가 나온다. 대형 TV를 만들 때 버리는 자투리가 거의 안 생겨서 효율성이 높은 것이다.
10.5세대로 생산 시설을 바꾸고 대형 TV를 본격적인 주력 상품으로 삼기로 하는 결정은 경영적 위험을 수반한다. 더 큰 유리를 사용하려면 더 큰 건물과 장비, 새로운 기술 등이 필요하다. 수조원 단위의 많은 투자 비용이 발생한다. 유리나 패널에 작은 흠집이라도 있어 버려야 할 경우엔 폐기되는 유리 등의 면적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통째로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지금은 LG디스플레이와 몇몇 중국 업체만 10.5세대에 투자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세대 전환의 성공 여부는 결국 소비자 취향이 결정한다”고 했다. “10여 년 전 일본 가전회사 샤프가 일찌감치 10.5세대 원판을 도입한 적이 있습니다. 대형 TV를 대대적으로 생산하고 홍보했지요. 그런데 소비자 반응이 싸늘했어요. 사실 그렇게 큰 TV로 볼 만한 콘텐츠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샤프는 당시 결정으로 큰 타격을 입고 거의 파산 위기까지 내몰렸습니다. ‘자투리’만 덜 남기려다 TV가 안 팔려 더 큰 손실을 입은 겁니다.”
‘자투리 비용’은 구두를 만들거나 요리를 할 때만 중요한 게 아니다. 첨단 제품을 만들 때도 때로는 ‘자투리의 경제학’이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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