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이 미국 뉴욕 증시에 안착한 11일(현지 시각)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마켓컬리가 쿠팡에 이어 올해 뉴욕 증시 상장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마켓컬리 관계자는 “한국과 미국,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검토 중”이라고 12일 밝혔다. 쿠팡에 이어 마켓컬리까지 뉴욕 증시 직행을 노리자, 국내 스타트업 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한국 기업은 그간 활동 무대가 좁고 언어 장벽 문제로 해외 투자자로부터 충분한 가치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쿠팡이 우버(2019년) 이후 최대 규모 IPO(기업공개)로 성공 가능성을 입증하면서, 앞으로 한국 기업의 ‘제값 받기’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국내 스타트업계 한 관계자는 “야구 선수들의 꿈이 ‘메이저리그’라면, 스타트업 대표의 꿈은 ‘뉴욕 증시’일 것”이라며 “제 가치만 인정받는다면 뉴욕행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쿠팡을 시작으로, 향후 한국 스타트업의 미국 진출 러시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시장 ‘격’이 다른 미국 정조준
쿠팡의 뉴욕 증시 데뷔는 그간 한국 증시 상장을 목표로 했던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스타트업)급 기업들을 자극하고 있다. 미국 자본시장 규모는 한국을 압도한다. 한 벤처캐피털(VC) 업계 관계자는 “국내 VC들이 굴리는 자금은 많아봐야 1조원인데, 소프트뱅크벤처스 같은 해외 VC들은 단일 건에만 수조원을 투자한다”며 “그 정도 자금이면 해보고 싶었던 사업 모두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쿠팡에 이어 미국행을 선언한 마켓컬리는 2015년 창업한 신선 식품 ‘새벽 배송’ 서비스의 선구자다. 창업 원년 29억원이었던 연 매출은 2019년 4289억원으로 불어났다. 2019년 말 기준 마켓컬리의 기업 가치는 약 8억8000만달러(약 1조원)이었다. 지난해 코로나 사태로 신선 식품 배송 수요가 급증한 걸 감안하면, 현재 가치는 훨씬 더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내 한국 상장을 추진해 온 숙박 예약 스타트업 야놀자도 이번 기회에 미국 직(直)상장으로 선회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야놀자의 기업 가치가 국내에선 3~5조원 정도지만, 미국에서라면 10조원까지도 높아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최근 해외 투자자로부터 투자 유치에 성공한 인테리어 플랫폼 ‘오늘의집’, 국내에선 사업 확장이 제한적인 원격 의료 기기 스타트업 ‘스카이랩스’도 미국행 후보로 거론된다. 배달의 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도 독일 딜리버리히어로와 합병하기 전엔 뉴욕 증시 상장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스타트업 입장에선 뉴욕 증시 상장이 국내 상장보다 상대적으로 문턱이 낮을 수 있다. 국내에선 적자 규모 등 세세한 조건을 맞추기 어렵지만, 미국에선 성장 가능성을 입증하는 정도면 상장이 가능해 문호가 더 넓은 측면이 있다. 미국 투자자들은 한국 투자자보다 훨씬 다양한 산업에 관심을 갖고 있어, B2B(기업 간 비즈니스) 기업도 충분한 자금을 모을 수 있다.
뉴욕 증시엔 있고, 국내엔 없는 ‘차등의결권’ 제도도 스타트업 창업자에겐 유리하다. 이 제도는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해 경영자의 보유 주식에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한다. 쿠팡 김범석 의장의 경우, 지분율은 10.2%지만 의결권은 76.7%를 갖고 있다. 스타트업은 투자 유치로 지분율이 희석되는데, 차등의결권이 보장되는 뉴욕 증시에 상장하면 지분율 문제로 경영권을 잃을 우려는 낮다는 것이다.
◇미국 간다고 다 뜨는 거 아닙니다
그러나 뉴욕 증시 직상장이 ‘장밋빛 미래’를 보장해주진 않는다. 쿠팡에 앞서 미국 진출을 시도한 한국 기업은 10사였다. 이 중 9곳이 상장 폐지됐고 게임 업체 그라비티만 생존했다.
케이블TV 업체였던 두루넷은 1999년 11월 나스닥에 상장했으나, 직후 IT 버블이 꺼지며 경영난에 시달리다 3년여 만에 퇴출당했다. 반도체 검사 장비를 만드는 미래산업은 2008년 상장 유지 비용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자진 상장 폐지했다. 나스닥은 상장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매년 40억원 정도를 지불해야 한다.
벤처캐피털 tbt의 임정욱 대표는 “뉴욕 증시에서 거래되려면 충분히 큰 매출과 사업 규모를 유지하고, 해외 투자자들과의 원활한 소통도 필수적”이라며 “쿠팡을 필두로 글로벌 역량을 가진 스타트업이 늘어나고 있어 미국행 스타트업 수는 점점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