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26일 세계김치연구소가 개발한 ‘김치 양념 속 넣기 자동화 장치’의 기술이전 업체인 ‘인천김치절임류가공사업협동조합-농가식품 김치공장’에서 장치 시연회가 열렸다. 사진은 절인 배추를 투입하는 모습./세계김치연구소

중국의 절임 채소 ‘파오차이’에 대응해 김치 산업 경쟁력을 키운다며 김치산업진흥원이라는 공공기관을 신설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이미 김치 산업 진흥이나 해외 한식 홍보 등을 담당하는 공공기관이 2곳이나 있는데 또 만들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 2010년 “김치 관련 연구·개발(R&D)을 종합적으로 수행해 김치산업을 대표적인 성장 산업으로 키우겠다”면서 세계김치연구소를 만들었다. 100여명이 일하고 있다. 한식 산업을 발전시키고 해외에 알리는 첨병 역할을 한다는 ‘한식진흥원’도 있다. 하지만, 김치 산업을 총괄할 기관이 없다는 이유로 새 공공기관을 만들자는 의원 입법이 추진되는 것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이 법안에 따라 최근 ‘김치산업진흥원 설립 타당성 분석 연구’를 위한 용역 입찰을 공고했다고 4일 밝혔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설립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농식품부는 “기존 기관과의 차별화, 협력 방안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사실상 기존 기관들과 업무가 겹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공기관은 한번 생기면 없애기가 어려운데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 10년간 매년 평균 6.5개씩 늘어났다. 2011년 285개였는데 올해는 350개에 달한다. 공공기관에 대한 정부 지원도 급증하고 있다.

현행 공공기관운영법에 따르면, 정부 부처가 새로 공공기관을 만들려면 기획재정부의 공공기관운영위원회에서 타당성 심사를 받아야 한다. 세금이 들어가는 공공기관이 난립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다. 기존 공공기관과 업무가 중복되는지 여부 등을 가려내는 것이다. 하지만 곳간지기를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국회에서 새로 공공기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법률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신설을 검토하고 있는 ‘김치산업진흥원’ 역시 더불어민주당 주철현 의원이 낸 ‘김치산업진흥법’이 설립 근거다. 이 법이 통과되면 공공기관운영위원회의 심사 절차는 무용지물이 된다. 정부 부처가 공공기관을 새로 만들 때만 타당성 심사를 받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이 지난 10년간 해마다 6.5개씩 늘어난 것은 정부의 공공기관 관리·운영이 허술한 측면도 있지만 이처럼 의원 입법이라는 ‘샛길’이 열려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문재인 정부 들어 2018년 이후 늘어난 공공기관 30곳 중 50%(15곳)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의원입법 공공기관

의원 입법으로 공공기관이 만들어질 경우에도 정부 주무부처의 의견을 듣기는 한다. 하지만 부처 입장에서는 산하 기관이 늘어나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별로 없다. 국회의원들은 지역구 또는 유관 산업에 ‘공공기관을 유치했다’고 생색내기 좋고, 주무 부처 입장에서는 산하기관이 생겨 자리가 늘어나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인 셈이다. 심지어 정부 부처에서 “산하에 공공기관을 새로 만들 수 있도록 법안을 내 달라”고 요청해 이뤄지는 ‘청부 입법’도 있다는 말까지 국회 주변에서 나오는 상황이다.

의원 입법의 경우 사실상 타당성을 심사할 방법이 없는 셈이다. 공공기관 수는 지난 2011년부터 10년간 한 해도 빠짐없이 늘어났다. 김원식 건국대 교수는 “제동 장치가 없으면 공무원의 ‘자리 욕심’에 공공기관은 늘어나기 마련”이라면서 “공공기관 신설 시 타당성 여부를 엄격하게 심사하고, 공공기관의 존치 필요성을 주기적으로 평가해 통·폐합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올해 늘어난 기관 중 6곳이 의원입법

작년 5월 출범한 21대 국회 들어서도 새 공공기관을 만들자는 의원 법안이 60건 이상 쏟아졌다. 올해 늘어난 공공기관 10곳 중 6곳이 의원 입법을 통해 만들어졌다. 한국고용노동교육원·건축공간연구원·국립항공박물관·국립해양과학관·한국재료연구원·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 등이다.

특히 한국고용노동교육원은 한국노총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현 환경부 장관)이 낸 법안을 통해 만들어졌다. 지난 2009년 공공기관 선진화 차원에서 없애 한국기술교육대 산하기관이 됐었는데, 다시 독립기관이 됐다. 국민·청소년에 대한 노동인권교육 등을 맡는다. 국립해양과학관·한국재료연구원·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 등은 해당 법안을 낸 의원의 지역구나 인근 지역에 만들어졌다.

◇업무 겹치는 ‘쌍둥이 공공기관' 늘어나

기존 기관과 업무가 겹칠 우려가 있는 기관도 여럿이다. 국민의힘 김석기 의원은 고도(古都)역사문화화환경연구재단을 만들자는 내용의 고도보전·육성 특별법을 냈다.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해 법제사법위원회까지 올라갔다. 이미 있는 국립 문화재연구소와 업무가 겹친다는 지적이 있다. 한 국회 관계자는 “거의 같은 기능을 담당하는 ‘쌍둥이 공공기관'이 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중소기업진흥공단이 있는데도 비대면중소벤처기업진흥원을 별도로 만들자는 법안, 소상공인진흥공단이 있는데도 소상공인복지진흥원을 만들자는 법안, 국립국악원과 별도로 국악문화산업진흥원을 신설하자는 법안 등이 쏟아졌다.

전문가들은 “반드시 필요한 공공기관은 만들어야 하지만 중복과 비효율은 줄이고 막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인천공항공사 사장을 지낸 더불어민주당 정일영 의원은 최근 의원입법을 통환 공공기관 난립을 방지하기 위한 국회법 개정안을 냈다. 정부 출연 근거가 있거나, 총수입의 절반 이상이 정부 지원액일 것으로 추산되는 공공기관 등을 만드는 경우 법안 심사 과정에서 재정 당국의 의견을 듣고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와 협의하도록 하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