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그룹 지주회사들이 투자회사로 변신하고 있다. 지주회사는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서 계열사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회사를 말한다. 그동안 계열사로부터 배당금과 브랜드(회사 이름) 사용료를 받아 운영됐다. 하지만 최근엔 국내외 기업에 직접 투자해 수익을 얻을 뿐 아니라, 신재생에너지·바이오·물류 등 신사업 분야에서 적극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새로운 사업 생태계를 만들고 있다.
SK그룹의 지주회사인 SK㈜는 2018년 290억원을 투자해 미국의 차세대(전고체) 배터리 업체인 솔리드에너지시스템(SES) 지분 13.1%를 확보했다. 전기차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이 회사의 기술력도 주목받고 있다. 이 회사가 최근 올해 안에 미 증시 상장 계획을 발표하면서, SK㈜의 지분 가치가 약 3000억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지주회사들의 변신은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운영하는 ‘버크셔 해서웨이’를 모델로 하고 있다. ‘버크셔 해서웨이’는 보험회사 게이코(GEICO)와 철도 운송 업체 BNSF 등 400여 계열사를 거느린 지주회사이면서, 다른 기업들의 지분을 사고 팔아 수익을 얻는 투자회사이기도 하다. SK뿐 아니라 LG와 롯데, GS 등 다른 그룹도 이처럼 지주회사를 투자형으로 변신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카이스트 이병태 교수는 “바이오·신재생에너지 등으로 산업의 축이 급격히 변하는 상황에서 지주회사들이 계열사 관리라는 소극적 역할에서 벗어나 직접 투자로 역할을 넓히고 있다”고 말했다.
‘홀딩스’ 이름 뺀 SK… 인수 리스트 뽑은 LG
LG그룹 지주회사인 ㈜LG는 최근 투자·컨설팅 회사 출신을 적극 수혈하고 있다. 직급에 관계없이 글로벌 인수·합병(M&A)이나 투자 경험이 있는 인재 영입에 나서고 있다. 이 작업은 ㈜LG의 경영전략팀이 주도한다. 구광모 회장은 지난 2019년 경영전략팀을 신설하고 컨설팅기업 베인앤드컴퍼니코리아의 홍범식 대표를 영입해 팀장을 맡겼다. LG 관계자는 “인수 가능한 기업들의 리스트를 뽑아서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LG는 최근 자회사 LGCNS 지분 매각, 베이징 트윈타워 매각 등으로 마련한 현금 1조8000억원으로 새로운 투자에 나설 계획이다. AI(인공지능)·빅데이터·5G(5세대 이동통신)·헬스케어 분야의 기업들이 인수 대상으로 거론된다.
◇변신 중인 지주회사
2017년 투자회사 전환을 선언한 SK㈜는 직원 200여명 중 3분의 2 이상이 투자 관련 인력이다. 바이오·친환경·디지털·첨단소재를 4대 핵심 사업으로 삼고 투자 기업을 물색하는 것이 이들의 역할이다. 2018년 이후 이뤄진 20건의 해외 투자 규모는 공개된 액수만 2조6000억원에 달한다. SK는 올해 주총에선 영문 사명에서 지주회사를 뜻하는 ‘홀딩스’를 빼기로 결정했다. SK 관계자는 “지주회사의 성격을 투자회사로 완전히 바꾸었다”며 “신사업에 대한 전략적 투자뿐 아니라 투자 수익을 올려 신사업을 위한 재원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표적으로 SK㈜는 지난달 계열사와 함께 SK인천석유화학 사업장에 연 3만t 규모의 ‘액화수소 생산기지’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여기서 생산한 수소를 SK주유소를 통해 수소차에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수소의 생산부터 유통에 이르는 거대한 수소 산업 생태계를 구축해 정유사업에 버금가는 캐시카우로 키우겠다는 뜻이다.
거듭된 사업 부진으로 위기감이 커진 롯데그룹에서도 롯데지주가 신산업 투자를 시작했다. 이동우 롯데지주 대표는 지난달 주주총회에서 “바이오·스마트 모빌리티·전기차 배터리 등 신규 사업 모델을 연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롯데지주는 코스닥 상장기업인 엔지켐생명과학과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롯데가 바이오 산업에 뛰어드는 것은 1948년 그룹 설립 이후 처음이다.
GS그룹 지주회사 ㈜GS도 계열사들과 함께 1억5500만달러(약 1700억원)를 출자해 지난해 8월 미국 실리콘밸리에 벤처투자 법인 GS퓨처스를 설립했다. GS퓨처스는 디지털·친환경 분야에서 유망 기업을 물색하고 있다. (주)GS는 최근 국내에서도 벤처투자에 나서고 있다. 바이오·신재생에너지 관련 6개 스타트업을 발굴해 창업을 지원하고, 성과에 따라 전략적 제휴도 맺을 계획이다. 버섯 균사체를 활용해 대체육을 만드는 사업처럼 기존 GS의 사업과는 전혀 다른 분야들이 포함됐다.
◇그룹 신사업 발굴... “오너 리스크 분산 효과도”
각 그룹들이 지주회사에 투자처 발굴, 신산업 개발의 특명을 맡기는 것은 그룹 전체를 조망하며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정비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한 4대 그룹 지주회사 관계자는 “계열사 차원에서 인수·합병을 할 때 기존 사업과 관련이 전혀 없는 업체를 인수하기는 어렵다”며 “지주회사는 그런 틀에 얽매이지 않고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새로운 사업에 과감히 진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주회사의 역할 강화는 ‘오너 리스크’를 줄이는 효과도 있다. 그룹 오너들이 계열사 업무를 일일이 챙기다 보면, 경영상의 결정이 ‘배임’으로 내몰리는 경우가 있다. 이 때문에 개별 계열사의 경영은 전문 CEO에게 맡기고, 오너들은 지주회사를 통해 그룹 신사업을 발굴하고 챙기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최근 그룹 오너들은 지주회사 내 전략·재무 관련 조직을 강화해 신사업 발굴을 직접 챙기는 경향이 뚜렷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