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가상 화폐 투자 시장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해외 가상 화폐 투자자들은 세계 최초·최대 가상 화폐 비트코인을 주로 거래하지만, 국내에서는 비트코인 이외의 코인(알트코인) 투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한국의 가상 화폐 투자예탁금은 약 4조6200억원(2월 말 기준)으로 1년 전의 6배로 불어났는데 90% 이상이 알트코인에 몰려 있다.
21일 글로벌 코인 정보를 집계하는 코인마켓캡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한국은 전 세계 가상 화폐 거래의 약 10%를 차지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가상 화폐 투자가 과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비트코인보다 변동성이 크고 도박과 비슷한 폭탄 돌리기성 투기가 많이 이뤄지는 알트코인에 투자가 쏠려 있어 투자 손실 위험도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세계 가상 화폐 거래에서 비트코인의 시가총액 비율은 약 51%이고 거래량의 30%를 차지하지만, 한국의 경우 비트코인 비율이 6%에 불과하다. 나머지 94%는 알트코인 투자다. 이런 코인들 가운데 3분의 1 은 한국에서만 거래되는 가상 화폐로 추정된다. 이 같은 데이터를 분석한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 금융시장 규모에 비해 가상 자산 거래 비율이 매우 높고 알트코인에 쏠린 투자도 지나치다”고 말했다. 전 세계 거래소에 상장된 가상 화폐는 9400종에 달한다. 간단한 프로그래밍으로 만들어 낼 수 있어 계속 늘어나는 중이다.
이런 상황은 갈수록 악화하는 추세다. 알트코인 중에서도 비주류로 꼽히는 도지코인은 투기성 코인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최근 국내 하루 거래액이 코스피를 넘어선 적도 있다. 코인 정보 업체 코인힐에서 21일 기준 24시간 거래량을 분석한 결과, 한국 원화로 매매된 도지코인이 124억개로 달러·유로 등 모든 통화를 앞섰다. 2위인 유로 거래의 9배 수준이다.
박선영 교수는 “한국의 가상 화폐 시장은 비트코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글로벌 시장과도 완전히 분리돼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투자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전에 상장 기준 등에 대해 정부나 업계 차원의 가이드라인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 특히 엄청난 수수료 수익을 벌어들이면서 불확실한 알트코인을 무분별하게 상장하고 정보 제공 노력은 하지 않는 거래소 등은 향후 개인투자자 피해에 반드시 책임을 져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알트코인(잡코인)
비트코인을 제외한 다른 모든 가상 화폐를 뜻한다. 대체(alternative)와 코인(coin)의 합성어다. 비트코인, 이더리움, 리플 등 주요 코인을 제외한 나머지 코인을 통칭하기도 한다. 한국에선 이런 뜻으로 ‘잡(雜)코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코드 몇줄만 알면 코인 제조 뚝딱… 15분에 1개꼴로 쏟아져
전 세계의 가상 화폐 거래소에 상장된 가상 화폐 개수는 21일 오후 2시 기준 9410개에 달한다. 이날 오전 9시에 9387개였는데, 5시간 만에 23개가 늘었다. 15분에 한 개꼴로 새로운 가상 화폐가 생겨난 셈이다.
◇가상 화폐, 왜 이리 많을까
가상 화폐가 이처럼 무더기로 생겨나는 건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최근 쏟아지는 가상 화폐는 대부분 대표적인 가상 화폐인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을 복제하는 식으로 만든다. 블록체인 송금 시스템을 완전히 갖춘 기존 가상 화폐에 일부 기능을 덧붙여 다른 이름으로 내놓는 것이다. 박성준 동국대 블록체인연구센터장은 “요즘은 프로그램 코드 몇 줄이면 바로 발행이 가능하다”며 “인터넷 카페 개설하듯이 쉽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쏟아지는 가상 화폐 가운데 옥석을 어떻게 구별할까. 현재로선 가상 화폐 발행 업체가 공개하는 백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백서는 가상 화폐의 기술적 배경, 용도, 발행량, 향후 계획 같은 내용을 설명한 문서다. A4 용지 9장 분량의 비트코인 백서와 36장 분량의 이더리움 백서는 개발 원리와 철학이 정교하게 담겼다. 이더리움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은 백서에서 “금융·부동산 계약을 블록체인 기술 기반으로 체결하는 스마트 계약을 도입하기 위해 이더리움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인공지능’ ‘블록체인’ ‘4차 산업혁명’ 같은 허울좋은 단어를 짜깁기한 백서도 적지 않다. 블록체인 업계 관계자는 “많은 알트코인(중소 가상 화폐)이 실현 불가능한 계획을 백서에 써놓고 돈놀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가상 화폐 거래 어떻게 이뤄지나
가상 화폐를 사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ICO(가상화폐공개)에 나선 가상 화폐를 발행 업체로부터 구매하거나, 거래소에서 상장된 가상 화폐를 사는 것이다. ICO는 일반적인 기업공개와 비슷하다. 업체는 백서를 공개하고 투자자를 모집한다. 이어 공모가를 정한 뒤 가상 화폐를 판다. 증서 대신 가상 화폐를 받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ICO를 유사 수신 행위로 보고 전면 금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금 조달에 문제가 없는 대기업이나 유망 스타트업들이 자금 조달없이 가상 화폐를 발행한 뒤 곧바로 거래소에 상장해 유통시키는 경우도 있다.
거래소가 모든 가상 화폐를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국내 최대 가상 화폐 거래소 업비트는 178개, 2위 빗썸은 170개를 취급한다. 업비트는 ‘사전 검토’ ‘세부 검토’ ‘상장 심의 위원회 의결’ 3단계를 거쳐 상장을 결정한다. 해당 가상 화폐가 블록체인 개발 역량을 보유하고 있는지, 진행하는 사업이 위법하지 않는지, 해킹 방어 등 보안 역량이 있는지 등을 심사한다. 업비트 관계자는 “상장 후에도 운영이 미비해 투자자에게 피해를 줄 것으로 예상되는 종목은 거래 지원 종료를 한다”고 했다. 주식으로 말하면 ‘상장 폐지’다. 거래소는 수수료로 돈을 번다. 미국 1위 거래소 코인베이스는 거래 1건당 0.5%를, 업비트는 0.05%(원화시장 기준)를 수수료로 가져간다. 투자자는 블록체인의 미래를 보고 가상 화폐에 투자한다고 하지만, 정작 거래소는 블록체인이 추구하는 투명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거래소는 단지 가상 화폐를 대량으로 쌓아두고 거래를 중개하는 역할만 한다.
◇실생활에서는 어디에 쓰이나
가상 화폐는 최근 상품 결제에 쓰이며 실생활로 나오고 있다. 하지만 아직 시장의 선택을 받은 건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정도다. 세계 최대 사무실 공유 업체 위워크는 20일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으로 사무실 임대료를 받겠다고 밝혔다. 테슬라도 비트코인으로 전기차를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온라인 결제 업체 페이팔과 비자도 비트코인 결제를 허용했다. 하지만 시시각각 가격이 출렁이는 변동성이 가상 화폐 결제의 한계이다. 아시아 최대 가상 화폐 운용사 하이퍼리즘의 오상록 대표는 “가격 변동성뿐 아니라 비트코인의 느린 전송 속도와 이더리움의 높은 수수료도 거래 장벽”이라며 “장기적으로 변동성을 줄인 스테이블 코인(법정 화폐 가격과 연동되는 가상 화폐)이 등장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블록체인
데이터를 서로 줄줄이 연결된(체인·chain) 조각(블록·block)으로 나눠, 수많은 컴퓨터에 분산해 저장하는 기술이다. 데이터가 한데 모여 있지 않은 데다 내용이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어 현재 기술로는 위·변조가 불가능하다. 이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주는 보상이 바로 가상 화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