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 이후 가계 부채가 1800조원을 넘을 정도로 급속히 불어나면서 금융 분야의 불안이 글로벌 금융 위기와 카드 사태 등 과거 경제 위기 때보다 커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경제에 충격이 발생할 경우 대형 금융 위기로 번질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뜻이다.
한국은행은 9일 발표한 ‘최근 우리나라 금융사이클의 상황 및 특징 평가’ 보고서에서 “가계와 기업 부채의 추이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3분기 기준 민간 부채가 장기 평균에 비해 크게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특정 시점의 민간 부채와 장기 추세 사이의 격차를 뜻하는 ‘실질 신용 갭(gap)률’이 지난해 3분기 5.1%로, 신용카드 사태(2002년 4분기 3.4%)나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 위기(2008년 4분기 4.9%) 때보다 높았다.
‘실질 신용 갭률’은 민간의 부채가 장기 추세에 비해 얼마나 더 많거나 적은 상태인지를 가늠하는 지표다. 실질 신용 갭률이 5.1%라는 것은 민간 부채의 장기 평균이 100일 경우 지난해 3분기의 부채 규모가 105.1 정도까지 올라갔다는 뜻이다.
민간 부채가 과도하게 증가할 경우 금리가 상승하거나 빚을 내 투자한 자산의 가격이 하락하는 충격이 발생할 때 위기가 빠르게 번질 가능성이 커진다. 한은은 이런 상황을 ‘금융 불균형’이라고 부른다. 주식·부동산 등 자산 가격에 ‘거품’이 끼어 있으면 가격 하락 가능성이 커지면서 금융 불균형의 위험은 증가한다고 한은은 보고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해 8월 이후 미국 등 주요 국보다 먼저 기준금리를 인상한 중요한 이유로 이 같은 금융 불균형을 지목해 왔다.
코로나 이후에는 민간 부채가 늘어나는 속도도 경제 성장에 비해 가파르게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은 최근 2년 동안 26.5%포인트 급증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21.6%포인트), 카드 사태(8.9%포인트) 때의 상승 폭보다 크다. GDP 대비 부채 비율은 2011년 1분기 이후 42분기 연속 오르며 역대 최장 기간 상승을 기록 중이다.
보고서를 쓴 이정연 한은 금융안정국 팀장은 “민간 부채의 총량이나 증가율이 과거 위기 때보다 높은 수준에 있는 상태”라며 “당장 위기가 닥친다는 뜻은 아니지만 과거를 미루어 보면 이런 상태에서 대내외 충격이 발생할 경우 위기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과거 위기 때와 비교했을 때 금융회사들의 건전성이 견고하다는 점은 차이”라고 했다.
코로나 이후 부동산 가격 급등이 이끈 주택 대출 증가와 빚을 내 투자하는 이른바 ‘빚투’ 열풍이 겹치면서 한국의 민간 부채는 가계 빚을 중심으로 크게 불어난 상황이다. 가계 부채(신용카드 대금 포함)는 코로나 직전(2019년 4분기) 약 1600조원에서 지난해 말 1862조원으로 증가했다. 금융 당국은 가계 부채가 과도하게 늘었다고 보고 지난해부터 대출 규제를 통해 증가세 억제에 나선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