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비트코인 등 가상 자산에 대한 범정부적인 규제의 틀을 정하는 행정명령에 9일 서명했다.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가상 자산의 위험을 분석하는 한편 디지털 버전의 달러를 뜻하는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중앙은행 디지털 화폐)의 필요성을 검토하라는 내용을 광범위하게 담았다. 이른바 ‘디지털 자산의 책임감 있는 발전을 보장하기 위한 행정명령’을 발동하는 이유를 미 백악관은 “가상 자산의 규모가 빠르게 커져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 글로벌 금융 분야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유지하기 위한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미 대통령이 가상 자산과 관련해 구체적인 지침을 내린 것은 처음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행정명령은 가상 자산에 대한 관심과 논란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진 가운데 나왔다. 지난달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중국이 ‘디지털 위안화’인 CBDC를 과시한 데 이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서방 국가의 금융 제재를 가상 화폐로 무너뜨릴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달러로 대표되는 미국의 통화 패권을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여러 규제 당국이 제각각 가상 자산의 규제를 검토하는 상황에 백악관이 처음으로 공식적인 개입을 하겠다고 선언을 한 셈”이라고 전했다.
◇세계 100개국이 CBDC 검토 중
백악관은 행정명령을 내린 배경을 ‘가상 자산 시장의 빠른 성장’으로 꼽았다. 5년 전 약 140억달러에 불과했던 세계 가상 자산 시장 규모는 지난해 11월 3조달러로 급증했다. 백악관에 따르면 미 국민 중 16%(4000만명)가 가상 자산에 투자한 경험이 있고 CBDC를 검토 중인 국가는 100개가 넘는다. 규제 사각지대에 방치하기엔 덩치가 너무 커졌다는 뜻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이날 서명한 행정명령은 방대한 부처에 걸쳐 있다. 크게 셋으로 분류된다. 가상 자산의 성장이 개인·기업 등에 끼칠 위험이 없는지 검토하고, 가상 자산을 악용한 불법 자금 거래를 차단할 방안을 마련하고, 연방준비제도를 중심으로 CBDC 발행의 효용을 검토하라는 내용을 담았다.
특히 연준이 이미 연구 중인 CBDC에 대해선 미국의 이권을 감안해 도입 가능성을 검토하라는 강한 메시지를 담았다.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 시 필요한 기반 시설과 기술을 점검하고 다른 나라가 참여하는 CBDC 실험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라”고 행정명령은 전했다.
바이든의 행정명령이 발표된 후 가상 화폐 가격은 10% 넘게 급등했다. 지난 8일 3만7000달러까지 내려갔던 비트코인 가격은 이날 4만2000달러 선을 넘어서서 거래됐다. 시장이 규제 강화보다는 가상 자산의 제도권 편입 가능성에 더 주목했기 때문이다. 글로벌 가상 자산 거래소 코인베이스 파리아르 시르자드 최고정책책임자는 트위트에 “글로벌 무대에서 (가상 자산 관련) 혁신을 주도하겠다는 미국의 노력을 환영한다. 규제·입법 당국과 적극적으로 협조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달러 패권 위협에 “디지털 통화도 미국이 주도”
바이든의 행정명령은 디지털 영역에서도 미국의 통화·경제 패권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담았다는 평가다. “디지털 달러는 미국의 이권 및 민주적 가치에 부합해야 한다” “글로벌 금융에서 미국의 주도권을 강화할 것” 등 미국의 경제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행정명령 곳곳에 드러냈다. ‘CBDC 위안’으로 위안화의 디지털 기축통화 자리를 노리는 중국, 서방 국가의 금융 제재를 가상 화폐로 우회하려는 러시아·북한·이란 등의 위협을 ‘디지털 달러’를 통해 적극적으로 억제하겠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 주도 금융 제재가 오히려 달러의 패권을 흔들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어 미국 정부의 디지털 경제 주도권 확보는 더 절실해진 상황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유례없이 강력한 러시아 금융 제재는 이를 피하려는 국가에 디지털 화폐, 대안적 결제망 등을 만들도록 자극하는 부작용을 불러올 것”이라며 “현재 압도적 주도권을 장악 중인 달러에 강력한 금융 제재가 ‘독’이 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