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3대 도시이자 흑해로 통하는 최대 수출 항구가 있는 오데사. 이곳이 지난달 말부터 러시아의 집중 공격을 받고 완전히 멈춰 섰다. 비옥한 흑토(黑土) 지대인 우크라이나는 밀과 옥수수, 대두 등 곡물 생산량이 많아 ‘세계의 빵바구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다.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곡물 대부분은 오데사항에서 선적된 뒤 흑해 건너 터키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해 전 세계로 공급돼왔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현재 밀 등을 실은 대형 선박 300여 척의 발이 묶인 상태다. 독일 최대 농업 무역업체인 바이바(BayWa)의 곡물 거래 책임자인 요르그 사이먼 이머즈는 지난 16일(현지 시각) DPA통신에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출발하는 물량이 하나도 없다. 제로(0)다”라고 말했다.
◇러시아, 농산물 수출 금지령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지난 14일 밀·호밀·보리·옥수수 수출을 6월 30일까지 금지하고, 백설탕과 원당 수출은 8월 31일까지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미국과 유럽 주도의 경제 제재로 물가가 뛰어 국내에 물량을 우선 공급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경제 제재에 맞서 러시아가 사실상 식량 무기화 전략을 펴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온난화로 가뜩이나 작황이 나쁜 데다 유가와 비료 가격이 치솟는 와중에 원재료 공급까지 줄어들면서 세계 식량 시장에는 비상이 걸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2월 24일) 이후 2주 만에 시카고상품거래소에서 밀 선물 가격이 50% 급등하는 등 애그플레이션(agflation‧농산물 가격 급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경고등이 켜졌다.
◇밀 등 러시아·우크라 의존도 높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밀, 옥수수, 해바라기씨, 유채씨, 해바라기유의 세계 최대 수출국이다. 세계인의 35%가 주식(主食)으로 삼는 밀(소맥)의 경우 작년부터 올 2월 사이 이 두 나라가 수출한 물량이 전체의 28.3%다. 유럽연합 전체(18%)나 호주(12.5%), 미국(10.8%)보다 훨씬 많다.
유엔 산하 세계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세계 50국 이상이 밀 수입량의 30%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중 26국은 필요한 밀의 절반 이상을 두 나라에서 수입하고 있다. FAO의 막시모 토레로 수석 경제분석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전 세계의 식량 안보에 중대한 위기가 닥쳐올 수 있으며, 특히 해외 수입에 식량을 의존하는 나라의 저소득층은 가격 인상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는 코로나 팬데믹 후유증으로 모든 자산 가격이 오르는 인플레이션 국면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다르다. 팬데믹으로 세계 공급망이 이미 꼬여버린 상황에서 비료 가격 상승, 원유 등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농산물 생산 원가가 뛰는 와중에 발생했다.
곡물 가격 상승은 또 육류 가격 상승 등 연쇄효과를 일으킨다. 전 세계 옥수수 생산량의 약 60%가 가축 사료용으로 소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통신은 19일 러·우크라이나 전쟁발 농산물 가격 상승에 대해 “타이밍이 이보다 나쁠 수는 없다”고 평가했다.
◇밥상 물가 급등 경고등
우크라이나 사태는 우리 밥상 물가도 위협하기 시작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밥상 물가(식료품 및 비주류 음료)는 전년 동월 대비 3.6% 올랐다. 2월 물가에는 아직 전쟁 여파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는데도 밀가루가 작년 대비 13.6% 올랐고 라면 10.3%, 파스타면 13.2%, 국수 28.1%, 부침 가루 30.7% 등 대부분이 두 자릿수 상승률을 기록하고 있다.
국제 곡물 가격이 국내 음식료 업체들의 원재료비 상승에 영향을 미치기까지는 통상 3~6개월의 시간 차가 발생하기 때문에 2분기에는 밥상 물가가 더 큰 폭으로 급등할 것으로 보인다.
원가가 뛰면서 식품 기업들의 이익 축소 부담도 예상된다. 주요 음식료 업체들의 매출 원가에서 곡물이 차지하는 비율은 적게는 20%에서 많게는 80%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