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플레이션이 심화하는 가운데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이 치솟으면서 한국의 물가 충격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환율 상승은 한국이 수출하는 상품의 가격을 낮춰 무역 경쟁력 제고에 도움이 되지만 지금의 경제 환경은 원저(低)를 반기기 어려운 상황이다. 수입품의 원화 기준 가격을 높여 안 그래도 심각한 인플레이션에 기름을 부을 수 있고, 증시 등 자본시장에서 외국인 자금이 유출될 위험을 키우기 때문이다. 이른바 ‘나쁜 원저’가 경제에 충격을 유발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글로벌 경제에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 위험이 커지는 가운데 발생하는 환율 상승은 한국 경제에 더 큰 부담을 주는 요인이다. 세계은행은 26일(현지 시각) 발표한 ‘상품 시장 전망’ 보고서에서 세계 경제에 50년 만에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인더미트 길 세계은행 부총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두 나라가 많이 생산해온 식량과 에너지 가격이 급등해 1970년대 이후 가장 강력한 상품 가격 충격을 유발할 것”이라며 “(전쟁으로) 무역·생산·소비에 차질이 빚어지는 지금의 상황은 스태그플레이션의 유령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했다.
◇환율 상승, 인플레이션 불길에 ‘기름’
지난 2년간 세계 에너지 가격 상승 폭은 이미 1973년 ‘석유 파동’ 이후 가장 높은 상황이다. 세계은행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에너지 가격을 추가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보았다. 올해 브렌트유 평균 가격이 전년보다 40% 올라간 배럴당 100달러로 상승하리라고 전망했다. 세계은행은 “(전쟁 탓에) 올해 에너지 가격이 50% 이상 상승한 후 2024년에서야 진정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에너지·식량·비료 가격 등이 급등하며 발생하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전 세계 가계가 생활비 부족 위기를 겪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내놨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코로나 방역을 위한 중국의 대도시 봉쇄가 초래한 공급망 차질 등이 겹쳐 글로벌 인플레이션 ‘불길’이 커지는 가운데 한국의 물가 상승률도 치솟고 있다. 소비자물가가 지난달 전년 동월 대비 4.1% 올라, 10년 3개월 만에 4%를 넘어섰다. 27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1년 후 물가 수준에 대한 소비자 전망치를 뜻하는 ‘기대 인플레이션율’은 3.1%로 9년 만에 최고치로 상승했다. 기대 인플레이션율이 오르면 소비자들이 미래의 물가 상승을 걱정해 미리 물건을 사들이고, 이 때문에 물가 상승 압력이 더 높아지는 인플레이션의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
◇원저 지속하면 외국인 자금 이탈 우려도
달러 환율 급등은 미 연방준비제도가 인플레이션 방어를 위해 가파르게 기준금리를 올리겠다고 예고하자 시장에 불안이 번지며 촉발됐다. 인플레이션 상황에 닥친 ‘약한 원화’는 수입품의 원화 기준 가격을 끌어올려 소비자물가를 더 오르게 할 위험이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수입 물가 상승률은 이미 지난달 역대 최고인 35%를 기록했다. 이달 들어 심각해진 강(强)달러로 수입 물가가 더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수입 물가 상승은 시차를 두고 소비자 물가로 이어진다”며 “인플레이션 심화에 환율 상승까지 겹쳐 한국의 경제 여건은 빠르게 악화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지난 몇 년 사이 외국인 투자가 많이 늘어난 한국의 자본 시장도 환율 상승에 취약하다. 연준의 공격적인 기준금리 인상 기조가 초래한 불안이 번지면서 글로벌 증시가 이미 약세로 돌아선 가운데 원화 가치가 계속 하락하리라는 전망이 확산하면 한국에서 외국인 자금이 이탈할 위험이 커진다. 박성욱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원화 가치 하락에 미 연준의 가파른 기준금리 인상으로 (미국 대비) 한국의 상대적 금리까지 낮아질 경우 시장에서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갈 우려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반면 원화 가치 하락의 이점이라고 여겨져온 수출 경쟁력 강화는 그 효과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다. 한국이 아닌 현지에서 상품을 생산해 바로 파는 기업이 늘어 ‘환율 효과’가 점점 미미해지고 있어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한국 100대 기업의 해외 법인 매출은 지난 5년 동안 평균 5.6% 늘어 지난해엔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처음으로 절반을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