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엔화의 추락이 멈추지 않고 있다. 7일 뉴욕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엔화는 장중 132.97엔까지 올랐다(엔화 가치 하락).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2002년 4월 이후 2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지난 1월 말 달러당 113엔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반년도 안 되는 사이 엔화 가치가 17% 급락한 것이다. 일본 내에서는 달러당 135엔 선이 무너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엔화는 유로화와 비교해서도 7년 사이 가장 낮은 값에 거래되고 있다. 원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날 원·엔 환율은 전날보다 10.6원 내려간 946.1원에 마감했다. 원·엔 환율이 950원 밑으로 떨어진 것은 2018년 1월 이후 4년 5개월 만이다.
◇日 언론 ‘값싼 니혼’ 한탄
올 들어 엔화 값이 계속 하락하는 이유는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급격하게 금리를 올리고 있는데도 일본은행이 사실상 ‘제로 금리’를 고수하기 때문이다. 일본은행은 경기 부양을 목적으로 초완화적인 통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달러 값을 따라잡으려 애쓰지 않고 엔화 약세를 방조한다는 얘기다. 일본의 막대한 재정 적자와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 채무도 기준금리 인상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또한 전 세계적인 물가 상승이 나타나고 있는 것과 달리 일본은 아직 인플레이션 무풍지대다. 지난 4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2.5%다.
7일 엔화 값이 추가로 하락한 이유는 전날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통화 긴축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재확인한 것이 영향을 줬다. 미국의 고용 지표가 양호한 것도 연관이 있다. 미국 정부가 전날 발표한 5월 비농업 부문 고용자 수는 전달보다 39만명 늘어나 예상치(32만명)를 웃돌았다. 고용이 호조를 보이기 때문에 금리를 추가로 더 올리더라도 견딜 만한 여력이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에 따라 미국의 금리가 추세적으로 더 오를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었고, 이와 맞물려 엔화 값은 추가로 떨어졌다.
일본 내부에서는 엔화 값 추락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엔화가 싸지면 수입품 가격이 올라 국민이 생활고를 느끼게 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전 세계적인 공급난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원유·천연가스를 전부 해외에 의존하는 일본은 원자재 수입에 막대한 비용을 써야 한다. 일본 언론들은 ‘값싼 니혼(일본)’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을 내놓고 있다.
이날 오전 스즈키 슌이치 재무상은 엔화 급락과 관련해 “환율의 급격한 변동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외환시장의 움직임과 일본 경제 영향에 대해 긴장감을 가지고 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외국인 관광객 입국에 기대
일본에서는 엔화 값이 싸져 해외 여행객들이 놀러 오기 좋아졌다는 데 기대를 걸고 있다. 외국에서 온 여행객들은 일본에 들어오면서 자국 통화를 엔화로 바꾸기 때문에 엔화 약세를 막는 데 도움이 된다. 일본 정부는 지난 1일부터 하루 입국자 수 상한선을 1만명에서 2만명으로 늘렸다. 니혼게이자이는 “해외 관광객이 많을 때는 하루 9만명이 입국했다”며 “현재 상한선인 2만명으로 벌 수 있는 여행수지 흑자로는 한 달 치 무역 수지 적자를 상쇄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엔화가 추락하고 있지만 일본 경제가 근본적인 위기를 맞을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 많다. 일본은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외환보유액(약 1662조원 규모)이 둘째로 많다. 또한 미국과 상시적인 통화 스와프도 체결해뒀기 때문에 비상시 안전망도 갖췄다.
엔화 약세가 장기화될 경우 한국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이달 초 대한상공회의소 산하 싱크탱크인 지속성장이니셔티브(SGI)는 국내 기업들의 수출이 저하될 수 있는 요인의 하나로 엔저를 꼽았다. 일본 기업들이 낮은 엔화값을 활용해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흐름이 오래 지속되면 우리나라 수출 기업들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 기계, 전기·전자 등 우리나라의 수출 주력 품목은 여전히 일본과 경쟁 관계다. SGI는 “세계경제 둔화와 엔화 약세가 동시 진행됐던 1988~1990년, 2012~2015년에 국내 수출은 큰 폭의 둔화를 경험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