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문화·인종·국적의 원천이 다양한 ‘하이브리드 인재’가 많습니다. 여러 정체성의 합체가 빚는 창의성이 돋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치·종교의 핍박을 피한 이주민이나 후손이 국가의 명운을 가르기도 합니다. 국경을 초월해 족적을 남기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 봅니다.


2020년 8월 4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항만에서 커다란 폭발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중동의 파리’로 불리는 베이루트 시내에 굉음이 들리고 지축이 흔들렸죠. 218명이 죽고 6000명 이상이 다쳤습니다. 비극적인 폭발 사고는 세계 주요 언론의 헤드라인이었습니다. 바닷가 창고에 보관된 질산 암모늄이 폭발한 게 원인으로 추정됩니다.

저는 폭발 사고가 난 바로 그 창고 주변을 그보다 6개월 전인 그해 2월 24일 밤늦게 걷고 있었습니다. 초조한 마음을 달래기 어려워 바닷가를 걸었죠. 당시 파리특파원이던 저는 다음날 오전 11시 일본을 극적으로 탈출해 전세계적인 화제를 뿌린 카를로스 곤(Ghosn) 전 르노·닛산·미쓰비시 회장을 인터뷰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날 밤까지도 약속 장소를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신변 안전 때문에 동선을 노출을 최소화하려는 거였죠.

저는 ‘비싼 비행기값 들여서 출장을 왔는데 허탕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 카를로스 곤 쪽에서 밤늦게 ‘OO호텔 내 카페’라는 왓츠앱 메시지를 보내왔고 그제서야 숙소에 돌아와 잠에 들 수 있었습니다.

◇베이루트의 고급 부티크호텔에서 카를로스 곤과 단둘이 만나다

이튿날 찾아간 약속 장소는 화려하고 고급스럽지만 규모는 작은 부티크 호텔이었습니다. 외벽이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고 루프탑에는 수영장이 있습니다. 만나기로 한 카페는 수영장 바로 아래층에 있고,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야 갈 수 있었죠.

2020년 2월 25일 일본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카를로스 곤을 만난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부티크 호텔.

먼저 가서 기다렸습니다. 11시가 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습니다. 키가 190㎝는 되어 보이는 건장한 사설 경호원 한 명이 잽싸게 튀어나와 주변을 살폈습니다. 이어 노타이 차림에 수트를 입은 곤 전 회장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저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자리에 앉은 그는 “45분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배석자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2019년 연말 도쿄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 있던 카를로스 곤이 일본을 극적으로 탈출한 이후 한국 언론인으로는 처음 그를 만났습니다. 아직까지도 한국 언론인 중에 그가 일본을 탈출한 이후 직접 만나본 이는 없는 걸로 압니다. 그가 탈출 이후 레바논에서만 머물고 있고, 인터뷰 직후 코로나 사태로 이동이 끊겼기 때문에 어쩌면 그가 일본을 탈출한 이후 만난 유일한 한국인일지도 모릅니다.

2020년 2월 25일 인터뷰를 마치고 카를로스 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곤 전 회장이 했던 이야기는 이번 글이 길어지니까 다음 편에서 해보도록 하죠. 오늘은 먼저 프랑스·브라질·레바논의 3중 국적자인 그의 유별난 ‘하이브리드 인생 스토리’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는 레바논 핏줄로 브라질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공부한 다음 일본에서 세계 자동차업계의 거물로 우뚝 선 시대의 풍운아입니다.

◇브라질에서 태어나 할아버지의 나라 레바논에서 10대를 보내다

카를로스 곤은 1954년 브라질에서 태어났습니다. 브라질에서도 서부에 깊숙한 곳에 자리잡아 볼리비아와 인접한 포르투벨류라는 도시가 그의 고향입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레바논의 마론파(시리아·레바논 지역의 중동식 가톨릭 분파) 신자였습니다. 레바논에서는 지금도 여전하지만 20세기 초반 종교 갈등으로 극심한 혼란이 벌어졌습니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던 시기(1920~1944)도 있었죠.

카를로스 곤의 할아버지는 어지러운 현실을 피해 브라질로 이주합니다.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제법 사는 나라였고, 남유럽이나 중동에서는 기회를 찾아 남미로 이주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엄마 찾아 삼만리’도 이탈리아 소년 마르코가 아르헨티나로 떠난 어머니를 찾아 간다는 스토리 아니겠습니까.

브라질 서부에 자리잡은 카를로스 곤의 조부는 사업을 벌여 성공했습니다. 고무를 채취해 파는 도매업을 했고, 여행사도 운영해서 제법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카를로스 곤의 아버지 조르지도 사업가로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다이아몬드 무역을 해서 수입이 짭짤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카를로스 곤의 할아버지(고무)와 아버지(다이아몬드)는 브라질 내륙의 지역 특성을 잘 활용한 사업가였다고 볼 수 있죠.

카를로스 곤의 아버지 조르지는 같은 레바논계이면서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나 브라질로 넘어온 로즈 자자르라는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레바논인들은 해외에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카를로스 곤만 보더라도 두번 결혼을 했는데요. 둘다 레바논계 여성입니다.

1960년대 소년 시절 보이스카웃 복장을 한 카를로스 곤/프랑스 주간지 르푸앙

카를로스 곤의 부모는 포르투밸류에서 신혼 살림을 차렸지만 카를로스 곤이 2살 되던 해에 동부의 대도시 리우데자네이루로 이주합니다. 카를로스 곤이 2살 때 포르투밸류에서 더러운 물을 마시고 사경을 헤매다 겨우 살아난 일이 계기가 됐습니다. 그랬다가 다시 카를로스 곤이 6살이 된 1960년 그의 부모는 원래 가족의 뿌리인 레바논 베이루트로 이사를 갑니다. 후일 카를로스 곤은 “어린 나의 건강 때문에 부모가 베이루트에서 사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고 했습니다.

카를로스 곤은 부잣집 아들이었기 때문에 베이루트에서 사립학교에 다녔습니다. 스웨덴인 신부가 운영하는 가톨릭계 학교에서 초중고를 마쳤습니다. 레바논은 프랑스 식민지였고, 그 기간이 20년 조금 넘는 정도로 짧았지만 전략적으로 아직도 프랑스에 의지를 많이 하는 나라입니다. 카를로스 곤이 어릴 적에는 지금보다 레바논이 프랑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대개 프랑스 식민지였던 나라의 사립학교는 부유층 학생을 받아 공립학교들보다 불어 교육을 많이 시키고 프랑스 유학을 많이 보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베이루트에서 학업을 마친 뒤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뒤에서 두번째줄 가운데에 곱슬머리에 안경을 쓴 학생이 카를로스 곤이다./카운터스티어

◇샤를 드골의 후배로 프랑스 최고 엘리트 코스 밟아

레바논에 변변한 대학이 없어 카를로스 곤은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18세에 파리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의 사촌 형 랄프가 먼저 유학을 가서 엔지니어로서 자리를 잡은 게 도움이 됐습니다. 카를로스 곤은 모국어처럼 배워놓은 불어 실력과 타고난 두뇌를 밑천으로 곧바로 프랑스 최고 학벌 코스로 진입합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인맥을 많이 따지는 사회죠. 끼리끼리 뭉치는 학맥의 영향력이 상당합니다. 특히 엘리트 고등교육기관인 ‘그랑제콜(Grandes écoles)’에 들어가려는 상위권 학생들의 경쟁이 치열합니다. 4년제 대학을 다니다가 그랑제콜로 옮기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프레파(prépa)’라고 하는 2년짜리 코스에 들어갔다가 그랑제콜 입학을 시도합니다.

프레파는 고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모집하는데요. 소수의 명문고에 고교 과정과 별도로 설치돼 있습니다. 이를테면 경기고에 3년짜리 고등학교 과정이 있고, 학교 내에 다른 고등학교 출신도 시험을 쳐서 입학할 수 있는 2년짜리 예과 개념의 대학 교양 과정이 따로 있는 식이죠.

카를로스 곤은 파리 시내 스타니슬라고등학교의 수학·과학 분야 프레파에 합격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인 1804년 설립된 스타니슬라고는 프랑스 언론이 전국 1800여개 인문계고 순위를 매길 때 1~5위를 오르내리는 최상위권 학교입니다. 유명한 동문이 많은데요. 한국인들도 알만한 사람은 프랑스 초대 대통령 샤를 드골,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올,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아나톨 프랑스 등입니다.

스타니슬라고 프레파에서 2년 과정을 마친 카를로스 곤은 1974년 이공계 최고 그랑제콜인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에 들어갔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독보적인 권위가 있는 학교죠. 엘리자베트 보른 현 총리를 비롯해 프랑스 정부 고위직은 물론이고 유럽 대기업 CEO나 고위 임원에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이 다수 포진해 있습니다.

카를로스 곤은 또 루이 16세가 고위 기술 관료를 육성하기 위해 1783년 설립한 다른 명문 그랑제콜인 ‘국립광업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mines de Paris)’도 졸업했습니다. 프랑스 상위 엘리트들 중에서는 그랑제콜을 2~3곳씩 졸업하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태어난 나라 브라질로 돌아가 구조조정 전문가로 입신양명

카를로스 곤이 두곳의 명문 이공계 그랑제콜을 졸업한 학력만으로도 프랑스에서는 고급 일자리를 얻어 상류층으로 먹고 사는 데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프랑스 바깥으로 나가더라도 적어도 유럽에서는 엘리트로 대우받는 데 무리가 없습니다.

저는 카를로스 곤과 대화했을 때 그가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무리한 논리를 펼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수감 생활을 하고 법정 공방을 벌이면서 사람이 단단해진 듯 했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라는 건 확 와닿았습니다. 그의 영어는 불어나 중동식 억양이 강한 편이긴 하지만 알아 듣기는 쉬웠습니다.

그랑제콜을 마치고 1978년 그가 첫 직장으로 입사한 회사는 프랑스 타이어 회사 미쉐린(불어로는 미슐랭)입니다. 현장 교육을 마친 뒤 카를로스 곤은 27세인 1981년 프랑스 남부 블라코지에 있는 미쉐린 공장의 공장장이 됩니다.

프랑스에서는 최상위 그랑제콜 졸업생이 관료 조직은 물론이고 민간 기업에서도 한국인들이 보기에 놀라울 정도로 이른 나이에 고위 간부가 되는 일이 흔합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30대 초반에 투자은행 로스차일드의 임원으로 고액 연봉자가 되고 36세에 경제부 장관이 된 것도 국립행정학교(ENA)라는 그랑제콜 졸업생이라는 게 크게 작용했죠.


카를로스 곤은 세계적인 기업가가 된 초석을 태어난 나라인 브라질에서 쌓게 됩니다. 일터에서 관리자로서 역량을 인정받은 카를로스 곤은 1985년 미쉐린의 남미 지역 운영 담당 책임자로 임명돼 브라질에 부임합니다. 이곳에서 그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경기 불황에 견딜 수 있도록 강력한 구조조정을 추진합니다. 브라질과 남미도 노조가 강력한 곳이죠. 직원들은 다양한 나라 출신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카를로스 곤은 구조조정팀을 다양한 국적자로 꾸려 정리 해고 설득 작업에 나섭니다. 본인 스스로 중동 핏줄이고 브라질 태생이라는 점에서 ‘점령자’라는 이미지가 두드러지지 않았습니다. 브라질에서 사용하는 포르투갈어를 능통하게 구사한다는 점이 큰 무기가 됐습니다.

카를로스 곤은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본사가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남미 법인을 부임 2년만에 흑자로 돌려 놓게 됩니다. 카를로스 곤은 당시를 회고하며 ‘다문화 경영’을 했다고 말합니다. 눈이 파란 프랑스인이 본사에서 날아왔다면 하기 어려웠던 성과를 낸 거죠.


◇세계 자동차 업계의 스카우트 경쟁 끝에 42세에 르노 부사장으로 발탁

브라질에서의 성공이 발판이 돼 카를로스 곤은 1989년 35세에 미쉐린의 북미 지역 총괄 대표로 승진합니다. 이곳에서도 그는 거침없이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이것이 미쉐린의 사세 확장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사실 카를로스 곤을 혹평하거나 그가 과대평가됐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구조조정으로 사람을 내쫓고 비용을 줄이는 것만 잘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런 측면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는 노동계에서 ‘프랑스에서 날아온 악마’로 불립니다. 그러나 강력한 저항이 따르는 구조조정을 매번 해내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상대를 설득시킬 줄도 알고 밀고 당기는 협상력도 있어야 하고 강한 추진력도 필요합니다.

카를로스 곤은 글로벌 기업들이 군침 흘리는 몸값 높은 사람이 됐습니다. 유럽·남미·중동의 3개 문화를 몸으로 체득한 사나이입니다. 영어·프랑스어·아랍어·포르투갈어를 일상어로 구사할 줄 알고, 스페인어는 그보다 조금 못 미치지만 유창한 수준으로 합니다. 유럽 최고 수준의 학교를 나왔고, 역사와 문학에 대한 식견도 상당합니다. 게다가 구조조정의 대가로서 추진력이 성과로 검증된 사나이였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도 갖추지 못한 ‘스펙’을 갖고 있었습니다.

구조조정이 필요한 세계 주요 자동차업체들의 영입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1996년 루이 슈웨체르 르노 회장(의사 슈바이처 박사의 조카의 아들입니다)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여 르노에서 남미 지역 관리, 연구개발, 파워트레인 생산 등을 담당하는 부사장으로 이적합니다. 당시 슈웨체르 회장은 카를로스 곤에게 프랑스 국적도 취득할 것을 권유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보기 드문 3중 국적자가 된 것입니다.

르노는 1990년대초 볼보 인수 협상에서 실패한 뒤 적자가 쌓여 침체기를 겪었지만 비용 절감의 대가답게 카를로스 곤은 다시 회사가 흑자로 돌아서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일본에 가서 병든 닛산을 살려내다

르노는 1999년 르노·닛산 얼라이언스를 출범시키면서 카를로스 곤을 닛산의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임명해 일본으로 보냅니다. 2001년 그는 닛산의 최고경영자가 됐습니다. 당시 닛산은 재무 상태가 엉망이었습니다. 2조엔이 넘는 부채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카를로스 곤은 일본의 종신 고용 문화를 깨버리고 무자비한 구조조정의 철퇴를 가했습니다. 닛산 전체 근로자 중 15%인 2만명이 넘는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했죠. 일본 내 5개의 공장을 폐쇄했습니다. 대리점도 300개 이상 없앴습니다. 일본에서 ‘코스트 킬러(cost killer)’라고 불렸습니다. 일본식 연공 서열 승진도 무너뜨렸죠. 닛산은 2003년 부채를 완전히 해결했습니다. 살인적인 비용 절감으로 급속도로 재무 상태가 호전됐습니다.

구조조정을 한다고 기업이 무조건 살아나지는 않습니다. 비용 절감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하죠. 카를로스 곤은 현장을 많이 찾아갑니다. 어디가 방만한 지점인지 잘 짚어냅니다. 그리고 일을 많이 합니다. 일본에서 그는 편의점 명칭대로 ‘세븐 일레븐’이라고 불렸습니다. 오전 7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한다는 거죠.

2006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카를로스 곤/Wikiwand

제가 ‘당신은 일본에서 가혹한 구조조정으로 악명이 높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카를로스 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는 “도쿄의 식당에 가거나 길을 지날 때 많은 일본인들이 나를 보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닛산을 살려놓은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다. 특히 닛산 주가를 끌어올려줘서 고맙다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닛산의 주가는 2000년 500엔 정도였는데요. 그가 회사 체질을 바꾸자 2006년에는 1500엔까지 올랐습니다. 무리한 구조조정으로 비난을 받았지만 실적이 좋으니 찬사도 쏟아졌습니다.

2005년 슈웨체르 회장의 뒤를 이어 카를로스 곤은 르노의 회장으로 취임해 최고경영자가 됩니다. 이사회 의장직도 맡았습니다. 포천지 선정 글로벌 500대 회사 가운데 두 곳(르노와 닛산)에서 동시에 최고경영자를 맡는 전인미답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그는 2016년에는 닛산이 미쓰비시의 지분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흡수해 르노·닛산·미쓰비시의 회장이 됩니다.

가혹한 구조조정을 했던 카를로스 곤은 르노와 닛산 양쪽으로부터 엄청난 보수를 받아 늘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2012년의 경우 르노에서 1120만유로, 닛산에서 893만유로를 받았는데요. 합쳐서 2013만유로는 현재 환율로 273억원에 이릅니다. 매년 이런 거액을 받아서 프랑스, 레바논, 브라질, 일본에 고급 주택을 사들여 호화 생활을 했습니다.

카를로스 곤은 2005년부터 르노와 닛산의 회장을 겸임하면서 도쿄와 파리를 자가용 비행기로 오가는 생활을 했다./카운터스티어

◇일본 문화 무시하고 장기 군림하다 일본 검찰의 역습에 당해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했지만 카를로스 곤의 성공 스토리는 2018년 11월 막을 내립니다. 도쿄 하네다공항에 전용기로 도착했을 때 일본 검찰에 전격적으로 체포되죠. 회계 부정 혐의입니다. 카를로스 곤은 자신의 다문화 배경의 이점을 활용해 젊은 시절 큰 성공을 거둡니다. 문화적 배경이 익숙한 프랑스와 브라질이 무대였던 점이 큰 도움이 됐죠. 하지만 일본은 달랐습니다.

그는 일본 문화에 이질적이었지만 17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경영자로 군림했습니다. 자동차 산업은 일본이 (2010년부터 중국에 밀려 3위가 됐지만) 경제 규모 세계 2위 국가로 우뚝 서게 된 핵심 비즈니스입니다. 일본의 자존심이 응축된 산업에 외국인이 최고경영자로 들어와 마음대로 휘저었습니다.

2011년 일본 규슈의 닛산 공장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듣고 있는 카를로스 곤.

일본 검찰의 씌운 혐의(다음 편에서 다뤄보겠습니다)는 과연 죄가 되는지 논란이 될만한 소지가 있습니다. 의도적인 죽이기라는 주장이 일리가 없는 게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카를로스 곤을 지켜볼 때 닛산을 살려낸 은인이라는 이미지는 점점 희미해지고, 닛산을 너무 오랫동안 쥐고 흔든다는 불만이 점증되면서 점점 일본 사회의 거부감을 키운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던 차에 일본 검찰의 일격에 당한 겁니다.

카를로스 곤은 한 직장에서 40년 넘게 일하고 퇴직하는 일본의 직업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걸 깨뜨리자 일본인들의 거부감은 상당했습니다. 미국인 저널리스트로서 아시아 자동차 시장 전문기자인 한스 그라이멀과 로이터통신 등에서 일한 프리랜서 기자 윌리엄 스포사토는 작년에 카를로스 곤의 일본에서 이야기를 다룬 책 ‘충돌 침로(Collision course·충돌이 예상되는 상황이나 진로)’를 펴내고 “카를로스 곤이 일본을 한참 몰랐다”고 했습니다. 물론 저자들은 카를로스 곤에게 일방적 공격을 가한 일본 정부도 비판해서 중립을 지켰다는 평을 듣습니다. 그라이멀과 스포사토는 둘다 아내가 일본인이고 도쿄에서 오래 일했습니다.

카를로스 곤과 일본과의 갈등을 다룬 미국 기자들의 저서 ‘Collision course'/윌리엄 스포사토 트위터

그라이멀과 스포사토는 책에서 카를로스 곤이 일본식 평생 직장 개념을 무시한 것으로 모자라 다른 회사 사람을 스카우트해서 중책을 맡기는 행위가 강한 거부감을 불렀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카를로스 곤이 도요타의 최고경영자인 도요타 아키오 사장의 10배에 이르는 보수를 받는 데 대해 비판이 나오자 “영미권 경영자들은 나 정도 받는다”며 일축한 것도 일본 문화를 무시한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일본 경영자들은 자기자신보다는 회사를 내세우는 전통이 있지만, 이미 스타 경영자였던 카를로스 곤은 일본인들이 보기에 회사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해 광을 내기를 좋아했다는 것도 비판의 포인트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카를로스 곤은 너무 이른 성공으로 자신감이 지나쳤습니다. 프랑스의 최상위 그랑제콜 출신 엘리트 중에는 이런 오만함에 빠진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마크롱 대통령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카를로스 곤은 이른 성공으로 50대 초반에 르노·닛산의 회장이 된 이후,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걸 멈추고 계속 자신의 제국에서 왕 노릇을 오래 이어가기를 원하면서 아름답지 못한 결말에 빠지게 됐다고 봅니다.

카를로스 곤은 이례적으로 3개 대륙의 정체성이 혼합됐다는 특별한 경험을 살려 일찍 성공했지만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일본에서 오랫동안 경영자로 ‘장기 집권’을 하다가 적절한 퇴장 시기를 놓쳤습니다. 2018년 이미 64세였던 그가 닛산 회장을 4년 더 맡기로 한 것은 노욕이라 비판받을만 합니다. 이때 일본을 떠났다면 쇠고랑을 차는 일은 피할 수 있었을텐데 두고두고 후회가 되고 있을 겁니다. ‘박수 칠 때 떠나라’라는 말이 있죠. 새로운 목표를 향해 계속 도전하지 않고 고인 물 속에서 장기간 헤엄치다보면 역풍을 만나게 된다는 게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던져주는 교훈일지도 모릅니다.

글이 길어지는 관계로 카를로스 곤이 체포됐다가 일본을 탈출한 이후 어떻게 레바논에서 그를 인터뷰를 하게 됐는지, 그가 일본 탈출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그의 남은 일생은 어떻게 될 것인지, 레바논이라는 나라의 특이한 역사적 배경과 대외 전략이 어떤 특징이 있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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