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문화·인종·국적의 원천이 다양한 ‘하이브리드 인재’가 많습니다. 여러 정체성의 합체가 빚는 창의성이 돋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치·종교의 핍박을 피한 이주민이나 후손이 국가의 명운을 가르기도 합니다. 국경을 초월해 족적을 남기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 봅니다.
지난주에 이어 일본에서 가택 연금 중 극적으로 탈출한 카를로스 곤 전 르노·닛산·미쓰비시 회장을 둘러싼 이야기를 마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그가 일본을 탈출한 이후 한국 언론인으로는 유일하게 그를 만나봤습니다.
2020년 1월 30일 유럽특파원이던 저는 런던 시내에 있었습니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하루 앞두고 영국의 분위기를 취재중이었죠. 그때 서울의 회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카를로스 곤이 인터뷰를 할 의향이 있다며 런던에서 그와 관련된 사람이 연락을 해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카를로스 곤이 일본을 탈출한 지 한달 밖에 되지 않았던 때라 세계 어떤 언론사든 그를 만나고 싶어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저희 국제부 데스크는 “과연 카를로스 곤과 연결이 된 사람인지 확인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낚시’일 수도 있다는 거죠. 섣불리 중동에 가는 건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시 건네 받은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서 킹스크로스역 건너편 카페에서 서울에 전화를 건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40살 전후 여성이고 동양인이었습니다. 명함 가운데 이름에 ‘Jung’이라고 돼 있었습니다. 정씨가 아닌가 해서 한국인이냐 했더니 “한국에서는 태어나기만 했다”며 살짝 떨떠름하게 말했습니다. ‘Jung’이라는 건 한국 성씨 ‘정(鄭)’이 아니라 입양된 독일계 부모의 성 ‘융’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한국말은 전혀 못했습니다. 그런데 카를로스 곤측에서 일하는 사람인지는 의외로 쉽게 확인이 됐습니다.
◇프랑스 최고 로비스트 주선으로 카를로스 곤을 만나다
그녀가 일하는 회사는 ‘이마주셉트(Image7)’였습니다. 이마주셉트는 프랑스 정·관계를 움켜쥐고 있다는 유명 로비스트 안 메오(Anne Méaux)가 1988년 설립한 커뮤니케이션 전략 컨설팅 회사입니다. 카를로스 곤은 일본에서 탈출한 직후 이 회사와 계약을 맺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습니다.
안 메오는 1954년생으로서 1970년대 엘리제궁에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텡 대통령의 공보실 직원에서 시작해 정·관계와 언론계의 막후 거물이 됐습니다. 일간 르몽드는 그녀를 ‘커뮤니케이션 여제’라고 한 적 있습니다.
다행히 저는 안 메오를 만난 적 있습니다. 2018년 7월 전설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작품 활동을 했던 프랑스 남부 도시 아를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인사를 건넸더니 명함을 갖고 다니지 않는다는 그녀는 제 수첩에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줬습니다. 이 번호를 저장해두고 종종 그녀에게 안부를 전했던 저는 즉시 전화를 걸어 카를로스 곤이 조선일보와 만날 의향이 있는 것인지 확인했습니다.
안 메오는 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카를로스는 주요 10여개국을 정해놓고 각 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 한 곳하고만 인터뷰를 하려고 한다. 한국은 당연히 조선일보다. 우리 직원들이 당신을 베이루트에 있는 카를로스와 만나게 해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난주 뉴스레터에서 이야기한대로 파리에서 베이루트에 날아가서 카를로스 곤을 인터뷰했던 것입니다.
◇10억원 넘는 돈을 주고 전직 미군 특수부대원에게 의뢰해 일본 탈출
저는 카를로스 곤에게 일본에서 어떻게 탈출했는지 물었습니다. 그게 제일 궁금했죠. 그는 “탈출 방법은 언급하기 곤란하다. 나를 도와준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 있어 민감한 문제다. 다만 실제 탈출을 준비한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는 것만 이야기하겠다”고 했습니다.
카를로스 곤은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지만 이후 일본 검찰의 수사로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습니다. 카를로스 곤의 부인 캐롤 곤이 미국 특수부대 출신 사설 보안 전문가인 마이클 테일러와 아들 피터 테일러에게 부탁했습니다.
음악가로 위장한 테일러 부자는 카를로스 곤을 대형 악기 상자에 넣어 오사카의 간사이공항에서 자가용 전세기에 태웠죠. 자가용 전세기는 보안 검색이 다소 허술한 편입니다. 카를로스 곤은 중간에 터키를 거쳐 레바논 베이루트에 도착한 다음 “나는 베이루트에 있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테일러 부자는 사례금으로 현금과 가상화폐를 합쳐 약 130만달러(현재 환율로 약 16억8000만원)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죠. 테일러 부자는 2020년 5월 미국에서 체포돼 일본으로 범죄인 인도가 된 후 일본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징역 2년, 아들은 징역 1년8개월이 확정됐습니다. 생각보다 높은 형량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2020년 2월 제가 카를로스 곤을 인터뷰했을 당시에 눈여겨볼만한 내용을 다시 복기해보겠습니다.
―레바논에 와보니 사람들이 당신에게 호의적이다.
“레바논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일본에서 체포되고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게 되자 놀랐다. 1999년 매우 어려운 상태에 빠진 닛산에 아무도 도전하려하지 않을 때 나는 과감히 닛산을 맡아 살려놓았다. 아주 확실한 성공이었다. 일본을 위해 20년간 개처럼 일하고 노력하고 좋은 일을 한 나에게 대체 왜 일본이 (체포해서) 학대하고 혹사했는지 레바논 동포들은 의문을 표시한다.”
―일본 검찰이 어떻게 했길래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처음부터 유죄를 단정하고 자백을 강요했다. 순순히 자백하지 않으면 내 아내와 자식들에 대해서도 수사를 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가족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협박이었다. 일본은 선진국 아니었나. 피의자의 가족을 건드리면서 수사하는 것은 기본적인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다. 일본 검사들은 오로지 이기는 데만 혈안이 돼 있을뿐 진실은 외면했다. 나는 도망간 게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사법제도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일본구치소는 엄격하기로 소문이 자자한데 힘들지 않았나.
“말도 마라. 보석으로 풀려나기 이전 4개월 동안 밤에 잘 때도 불을 안 끄기 때문에 괴로웠다. 샤워는 일주일에 두 번만 허용됐다. 정말이다. 시계를 소지할 수도 없었다. 가족·지인들이 책을 넣어주면 간수들이 모조리 미리 읽어봤다. 심지어 펜과 종이로 메모를 하는 것마저도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닛산을 살려낸 나를 마치 연쇄 살인범이나 집단 살인범과 똑같은 대우를 했다.”
―왜 탈출을 결심했나.
“당신은 한국인이니까 일본을 어느 정도 알 것이다. 내 재판은 짧아도 3~4년 걸릴 것이다. 유죄로 몰아가고 있는데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는 뻔한 것이다. 보석으로 풀려난 다음 도쿄의 집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 있을 때도 아내와 접촉할 수 없었다. 재판부는 메시지도 주고받지 못하게 막았다. 이유는 내가 아내와 공모해 증거를 조작하거나 증인을 회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말도 안된다. 왜냐하면 다른 친구나 자식들은 집에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마음 먹으면 증거 조작이나 증인 회유를 왜 못하나. 집요하게 내가 아내와 접촉 못하게 막았다. 이건 나를 나약하게 만들어 내 스스로를 변호하려는 의지를 꺾어놓으려는 수작이었다. 내 일본인 변호사에게 ‘왜 피의자나 피고인이라고 해서 아내도 못 만난다는 말이냐’라고 했더니 그가 ‘30년에 걸쳐 그걸 부당하다고 이야기해왔는데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라고 대답하더라.”
―변호인 입회 없는 조사를 받았다던데.
“한국이 일본의 사법제도를 일부 가져간 것으로 안다. 그런 한국에서도 변호인 입회 없는 조사는 없어졌다고 들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게 아직도 당연시된다. 일본은 무죄 추정의 원칙이란 게 지켜지지 않는 곳이다.”
―당신이 너무 오래 닛산을 지배하다가 떠날 시기를 놓쳐서 스스로 화를 입은 건 아닌가.
“일본에서는 2년마다 CEO에 대한 신임을 묻는다. 2년마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2016년에는 은퇴하려고 했는데 일본측에서 붙잡았다. 가장 최근에 르노 회장직을 갱신한 2018년 6월에도 닛산이나 르노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리고 나서 5개월 후 나를 예고 없이 체포했는데 그 사이 무슨 일을 일본측이 계획했는지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다. 2009년에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어려운 상태에 빠진 GM(제너럴 모터스)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닛산이 금융위기로 어려운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도의적으로, 윤리적으로 닛산을 버릴 수 없었다. 당시 오바마의 제안을 거절했다가 이꼴을 당하게 된 것을 후회한다.”
―당신이 호화 생활을 한 건 맞는 것 같은데.
“나는 모든 게 만들어졌다고 본다. 최초에 내가 체포된 혐의가 뭔가. 보수를 적게 써냈다는 것이다. 그건 퇴임 후 받게 될 고문료로서 최종 결정도 안된 액수였고, 내 주머니에 들어온 돈도 아니었다. 일단 체포부터 되고나서 나머지 이야기는 만들어졌다. ‘카를로스 곤은 호화 생활을 했고 회사 돈을 펑펑 가져다 썼다’는 식의 이야기가 이후부터 만들어졌다. 내가 베르사유궁의 트리아농에서 호사스러운 파티를 연 것은 사실이고 두 차례 있었다. 한번은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1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한번은 2016년에 아내 캐롤과 결혼식 피로연을 연 것이다. 하지만 그건 르노가 베르사유궁의 스폰서였기 때문에 그쪽에서 이용을 하라고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검찰이 뭘 노린 것 같나.
“나는 체포될 것이라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이 닛산을 지키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체포된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나. 승자가 아무도 없다. 일본 검찰은 나만 파괴한 게 아니다. 닛산이 무너지고 있고, 르노 역시 무너지고 있다. 미쓰비시는 아주 비참한 지경에 처했다. 주주들이 첫번째 피해자들이고 두번째 피해자들은 닛산의 평범한 임직원들이다. 내가 체포된 이후 르노와 닛산의 주가는 거의 반토막이 났다. 현대차나 기아차는 주가를 일정 수준 유지하는 동안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실제로 2019년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 중에서 주가가 가장 많이 떨어진 곳이 닛산이었고, 그 다음이 르노였습니다.)
―당신은 프랑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는데.
“프랑스 정부는 카를로스 곤이라는 개인보다는 르노라는 회사가 더 중요할뿐이다. 사실 체포되기 직전 나는 프랑스와 일본 양쪽에 대해 모두 싸우는 상황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르노와 닛산의 완전한 합병을 원했다. 반면 닛산은 기존 얼라이언스 체제를 원했다. 나는 절충안으로 지주회사를 만들자고 했다. 하나의 지주회사 아래 르노, 닛산, 미쓰비시가 모두 자율을 가진 자체 경영을 할 수 있는 구조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도 반대했고, 일본측도 반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체포됐다.”(프랑스 정부는 르노의 최대주주이며, 르노는 닛산의 최대주주입니다.)
◇일본 사법제도를 격렬하게 비난한 카를로스 곤
이상의 인터뷰에서 알 수 있듯 카를로스 곤은 일본의 사법제도에 강한 불신을 표시합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합니다. 일본 교도소의 극악한 수형 환경은 워낙 잘 알려져 있죠.
그의 주요 혐의였던 보수 축소 신고는 2011~2015년 유가 증권보고서에 5년간의 소득 50억엔을 축소 신고한 혐의(금융상품거래법 위반)인데요. 뒤늦게 그 정도 사안으로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를 구속시켜야 하는 사안인지 논란이 있습니다. 그래서 닛산의 일본측 고위 임원들과 일본 검찰이 손잡고 카를로스 곤을 쫓아내려 공모했다는 의혹이 가라앉지 않고 있죠.
카를로스 곤은 탈출한 직후 1월 8일 베이루트에서 일본 사법제도를 강하게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당시 모리 마사코 일본 법무상은 즉각 반박 회견을 열어 “결백하면 당당하게 일본에서 재판을 받고 무죄를 입증하라”고 했죠. 하지만 이 발언 자체가 검사가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할 책임이 있다는 형사 소송의 기본 원칙에 위배되는 말이라는 지적이 서방 법률가들 사이에서 나왔습니다.
카를로스 곤은 레바논에서는 국민적 영웅입니다. 저와의 인터뷰가 끝났을 때 카페의 다른 테이블에 있던 레바논 사람들이 와서 그에게 악수를 청했습니다. 레바논에서 그는 세계 무대에서 성공한 영웅으로 여기죠. 2017년 그의 얼굴을 그려넣은 기념 우표가 발행된 적 있을 정도입니다.
◇프랑스에서도 버림받아 평생 레바논에 머물러야
카를로스 곤은 프랑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제가 카를로스 곤과 인터뷰를 하기 한달 전 폴크스바겐그룹에서 세아트 브랜드를 이끌던 루카 데 메오를 새로운 르노 최고경영자로 선임했습니다. 프랑스 국세청은 2020년 말 카를로스 곤의 탈세 혐의를 조사해 파리 시내 아파트를 비롯해 약 1300만유로(약 177억원)에 달하는 그의 프랑스 내 재산을 압류했습니다. 프랑스 검찰은 그에 대해 탈세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둔 상태입니다. 프랑스에 갈 수도 없게 된 거죠.
카를로스 곤은 죽을 때까지 레바논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입니다. 일본과 레바논이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아서 안전하지만 해외로 나갔을 때 제3국이 그를 체포해 일본으로 보낼 수도 있기 때문이죠. 제가 ‘세계를 누비던 경영자로서 답답하지 않겠나’라고 묻자 그는 “나는 원래 은퇴하면 이곳으로 오려고 했다. 언어도 통하고 여기는 나의 브라질계 인맥, 프랑스계 인맥이 모두 있다. 일본에서 재판을 받으며 가족·친구도 없이 인질처럼 갇혀 있느니 평생 레바논에만 있는 게 훨씬 낫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은 왜 한국에 과거사 사죄를 안하나”
그는 한국 언론과 인터뷰를 한다는 점을 의식해서인지 한국 사람이 들으면 반길만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제가 ‘왜 르노삼성은 왜 한국에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한국은 현대차가 강한 지배력을 갖고 있는 시장이다. 르노삼성만 힘들었던 게 아니라 GM대우 역시 한국에서 고전하지 않았나”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차 경영진은 수완이 좋다. 늘 배우고 책을 읽고 시장의 흐름을 보고 벤치마킹을 잘한다. 그리고 사람을 잘 데려다 쓴다. 작년에 현대차는 호세 무뇨스를 영입하지 않았나. 좋은 선택이다. 그는 내가 닛산에서 데리고 일할 때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임원이었다.” 호세 무뇨스는 현재 현대차 글로벌 최고운영책임자(COO) 겸 미주권역담당 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과의 인연을 물었을 때 그는 “일본에 있을 때 한국을 자주 갔다. 르노삼성 공장이 있었으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조선일보가 가장 큰 신문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일본에서는 삼성전자, LG전자를 비롯한 한국 대기업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고 지냈다”면서 이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사실 일본에 있을 때는 대놓고 이야기 못했지만 왜 그들은 한국과 중국에서 과거 그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면서도 사죄를 하지 않나. 난 그게 늘 의문이었다.” 한국 사람을 만나면 어떤 말을 하는 게 자신에게 유리한지 잘 아는 듯 했습니다. 머리가 좋고 아는 게 많은 사람입니다.
◇프랑스 식민 통치 23년뿐이지만 아직도 불어 쓰는 레바논
레바논에 가서 상당히 특이한 경험을 했습니다. 아랍어가 공용어이고 가장 많이 사용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불어도 일상에서 제법 씁니다. 매일 불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전체의 20%쯤 된다네요.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제1 외국어로 불어가 70%, 영어가 30% 비율입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를 탔을 때도 운전기사가 불어를 할 줄 알더군요. 영어보다 불어 실력이 좀 더 나았습니다.
프랑스는 레바논을 1920년부터 23년간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통치 기간이 상당히 짧다는 걸 고려하면 약간 의아하죠. 결국은 국력의 문제입니다. 나라가 어수선한 레바논은 프랑스에 의지해 원조를 많이 얻어냅니다. 프랑스와의 인연을 굳이 끊어내려 하지 않습니다.
프랑스인들도 레바논 같은 나라에 도움을 주는 게 자기네들의 이익에 부합합니다. 옛날 화려했던 19세기 식민 통치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죠. 아프리카를 비롯해 옛 식민 국가에서 불어를 여전히 사용하거나 ‘형님 국가’로 예우받는 걸 무척 좋아합니다.
◇베이루트 대폭발 후 “프랑스가 대신 통치해달라” 요구한 아이러니
2020년 8월 베이루트 대폭발 사고로 나라가 쑥대밭이 되자 레바논에서는 “나라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차라리 프랑스가 위임 통치를 해달라”는 요청까지 합니다. 당시 국제 온라인 청원 사이트에 “프랑스가 향후 10년간 레바논을 통치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왔고, 이틀만에 6만명 이상이 서명하기도 했습니다. 청원을 올린 이들은 “레바논은 국가 운영에 완전히 실패했다. 부패와 테러를 몰아내고 깨끗하고 견실한 지배 체제를 갖출 때까지 다시 프랑스 지배하에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다”라고 했죠. 우리 기준에서는 아연 실색할만한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식민 지배 이후에도 내전을 거듭하고 종교 대립에 따른 정치로 불안이 심각합니다. 이슬람교 양대 종파인 시아파와 수니파가 섞여 있고, 중동식 기독교 분파인 마론파 세력도 상당하죠. 종교 간 갈등이 첨예하기 때문에 1943년 프랑스에서 독립할 때 신사협정을 맺었습니다.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 출신이 나눠 맡는 원칙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죠. 놀랄만한 건 이런 종교별 권력 분할이 헌법에도 명시돼 있다는 겁니다.
싸우지 말라며 권력을 종파들끼리 분점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부패·무능·갈등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주도적인 통치 세력 없이 갈가리 찢겨 있었기 때문에 무책임한 국정 운영이 이어졌습니다. 종교 갈등도 멈추지 않았죠. 2차대전 이후 숫자가 늘어난 무슬림이 마론파 기독교도들과 충돌해 1975년부터 1990년까지 내전(內戰)을 겪었습니다. 15년간 약 20만명이 숨졌습니다. 2005년 이후로는 시아파 강경 무장세력인 헤즈볼라가 여권의 일원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하면서 레바논은 ‘중동의 화약고’로 불렸습니다.
이런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2020년 8월 대폭발 사고가 벌어져 마크롱 대통령이 베이루트를 찾아오자 마치 구세주가 찾아온 듯 반겼습니다. 수백 명의 시위대가 마크롱을 에워싸고 “정권 퇴진”을 외쳤습니다. 마크롱에게 레바논 집권 세력을 몰아내 달라고 요청한 거죠. 한 여성이 마크롱의 손을 잡고 “제발 우리를 도와주세요”라고 절규하자, 마크롱은 “당신이 왜 이러는 줄 안다”며 이 여성을 껴안았죠. 그러자 주변의 시위대가 박수를 쳤습니다. 이 장면이 유럽의 TV에 반복해서 나왔습니다.
옛 식민 통치국에 아직도 기대고 있는 레바논을 보면 한국은 정말 기적 같은 나라입니다. 식민 통치를 당하고 내전을 겪었는데도 경제 규모 세계 10위까지 올라섰다는 건 대단한 국가적 성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1980년 1인당 GDP는 한국이 1714달러, 레바논이 1552달러로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40년이 지난 2020년에는 한국의 1인당 GDP(3만1638달러)가 레바논의 10배가 넘었습니다.
◇하비브하우스로 유명한 필립 하비브 전 주한 미국대사가 레바논계
레바논인들은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기 이전부터 나라가 어지러워 해외에 나간 사람이 많습니다. 카를로스 곤이 태어난 브라질에만 레바논계 인구가 적어도 580만명으로 추정됩니다. 미국에 44만명, 프랑스에 30만명 등 모두 합쳐 1000만명 넘는 레바논계 사람들이 레바논 밖에서 살고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레바논 인구가 680만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죠.
우리가 알만한 레바논계로는 필립 하비브 전 주한 미국대사(1971~1974년 재임)가 있습니다. 주한 미국대사의 관저를 하비브하우스라고 하는데요.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었죠. ‘하비브’란 아랍어로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뜻이랍니다. 하비브는 레바논계 미국 외교관이라는 점이 부각돼 1980년대초 레바논 문제 해결을 위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중동 특사로 지명된 적 있습니다.
한국계 이민 2세로 미국에서 오바마 행정부의 보건부 차관보를 지낸 하워드 고(한국명 고경주)의 부인도 레바논계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의사죠. 이 부부의 아들 대니얼 고는 현재 바이든 행정부에서 노동장관 비서실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대니얼 고는 수재 집안 자식답게 필립스 아카데미를 나와 하버드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경영학 석사(MBA)도 하버드에서 받았습니다.
이외에 영화배우 조지 클루니의 부인 아말 클루니 변호사가 레바논계입니다. 히트곡 ‘다이애나’로 유명한 전설적인 가수 폴 앵카도 부모가 둘다 레바논에서 캐나다로 이주한 사람들입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견한 베스트셀러 ‘블랙 스완’의 저자 나심 탈레브 뉴욕대 교수도 레바논계입니다.
다음 뉴스레터는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의 양아버지로서 오늘날 블링컨을 세계 외교 무대의 주인공으로 만든 새뮤얼 피자르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유태인이었던 피자르는 극적으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참모가 된 영화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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