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분식집을 하는 40대 자영업자 이모씨는 올해 들어 코로나 방역이 완화돼 매출이 늘어나리라고 기대했다. 손님은 다소 회복됐지만 또 다른 어려움이 시작됐다. 식재료 가격이 급등하지만 음식 값을 올리기엔 불안하고, 얼마 전 건물주가 임대료 인상까지 요구한 것이다. 이씨는 “부부가 나와서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지만 문을 열면 열수록 마이너스인 상황이다. 가게를 내놓은 상태인데 누구 하나 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2016년부터 인테리어 가게를 하고 있는 50대 김모씨는 최근 중학생 자녀가 다니던 영어 학원을 끊었다. 자재비와 함께 인건비가 올라 수익 내기가 어려워진 와중에 대출 이자가 올라 생활비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김씨는 “손에 쥐는 돈이 줄다 보니 대출 갚을 여력도 없어 줄일 수 있는 지출은 최대한 줄이려 한다”며 “앞으로 물가와 대출 금리가 더 오른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겁부터 난다”고 했다.
코로나 이후 경제 회복에 따른 공급망 차질과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 등으로 물가가 급등하면서 저소득층의 고통이 커지고 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지난달 14년 만에 최고인 전년 대비 5.4%를 기록했는데, 생필품 등을 모아 집계한 생활물가지수 상승률은 6.7%로 더 높았다.
◇“가격표 보기가 무서워요” 저소득층, 100만원 벌면 117만원 써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인 대구의 김모(63)씨는 뇌경색으로 쓰러진 남편을 돌보면서 정부가 주는 월 130만원 정도의 생계 급여로 생활한다. 작년까지는 월 70만~80만원 정도이던 생활비는 최근 100만원을 넘어섰다. 김씨는 “그래도 가끔은 한우를 사 먹었는데 이제는 꿈도 꾸기 어려워졌다”고 했다.
급격한 물가 상승으로 생계비가 빠듯한 김씨와 같은 저소득층은 한계 상황에 몰리고 있다. 본지가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 1분기 기준 소득 하위 20%의 소득 대비 지출은 117%였다. 이미 버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다는 뜻이다. 소득 상위 20%는 이 비율이 51%였다. 버는 돈의 절반 정도만 쓰고 있는 것이어서 물가가 어지간히 뛰어도 대처할 여력이 있다는 것이다.
◇저소득층 소득 생필품 사는 데 58% 들어가
저소득층이 인플레이션 대응에 더 취약한 것은 이미 생계가 팍팍한 상황이라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고소득층은 물가 상승에 따라 소비 수준을 낮춰 대처할 수 있지만 저소득층은 그럴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배추 값이 오르면 유기농 배추를 사 먹던 이들은 보다 저렴한 일반 배추로 바꿀 수 있지만, 일반 배추를 먹고 있던 저소득층은 이를 낮출 여력이 부족하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생계 유지와 관련한 지출이 비교적 큰 저소득층에겐 인플레이션이 피부에 더 와 닿을 수밖에 없다. 레저·저축 등을 줄여 대처할 수 있는 고소득층과 달리 저소득층은 아예 먹고살기 어려워지는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1분기 가계동향조사 분석 결과 소득에서 생필품 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소득 수준별로 크게 차이가 났다. 소득 하위 20%는 소득의 58%가량을 생필품(식료품, 주거·광열, 보건 지출)에 쓰는 반면 상위 20%는 이 비율이 16% 정도에 그친다.
한국은행이 인플레이션을 누르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시중 금리가 오르는 것도 저소득층에 위협이 되고 있다. 소득이 낮으면 빚이 많아 대출 이자 상환 부담이 커지지만, 예금 등 자산이 많은 고소득층은 금리가 올라갈수록 이득을 볼 수 있다. 소득 하위 20%의 지난 1분기 경상소득(이자·배당금 등을 포함한 소득)은 작년 3분기보다 9만8000원 줄었다. 상위 20%는 반대로 76만원이 불어났다.
강태수 카이스트 경영대 초빙교수는 “정부가 유류세 인하, 지원금 지급 등 인플레이션이 저소득층에 주는 피해를 줄이기 위한 지원책을 내놓기는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대책일 뿐”이라며 “계층별로 실질적인 물가 상승률을 별도로 계산하고, 이에 연동해 기초 생계비 등을 지급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