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2위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SK하이닉스가 충북 청주 반도체 공장 증설 계획을 전격 보류한 것으로 19일 확인됐다.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면서 반도체 업황 전망도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당초 SK하이닉스는 내년 초 청주 테크노폴리스 산업단지 내 43만여㎡ 부지에 4조3000억원을 들여 새 공장을 착공할 계획이었다. 현재 이곳엔 반도체 생산라인 3개가 있다.
하지만 SK하이닉스 이사회는 지난달 29일 상정된 청주공장 증설 안건에 대해 보류를 결정했다. SK하이닉스 사정에 정통한 재계 관계자는 “반도체 업황이 단기간에 반등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여, 청주 공장 착공은 언제가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블룸버그 통신도 지난 15일 “SK하이닉스가 내년 시설 투자 규모를 기존보다 25% 줄인 16조원으로 낮추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SK하이닉스 측은 “내년 투자 규모는 아직 검토 중이며 확정된 게 없다”고 해명했으나, 반도체 업계에선 이 같은 투자 감축 분위기가 점차 확산될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겨울’ 대비 나선 반도체 회사들
세계 주요 반도체 기업들은 최근 잇따라 투자 계획을 조절하며 ‘반도체 겨울’에 대비하고 있다. 코로나 엔데믹(풍토병) 전환, 인플레이션, 금리 인상, 중국 경기 둔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등으로 스마트폰·PC 등 IT 수요가 급감하며 반도체 수요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의 TSMC도 지난 14일 “2분기 시설 투자 비용을 전 분기 대비 22% 줄였다”고 밝혔다. 올해 최대 440억달러(52조원)를 투자하려던 계획도 400억달러로 조정했다. 대만 남부 가오슝의 TSMC 신공장 부지 주변의 고급 아파트는 몇 달 전만 해도 구매 대기자가 줄을 섰지만, 공장 완공 시기가 불투명해지며 지금은 할인 판매에 나선 형편이다. 메모리 반도체 3위 기업인 미국 마이크론의 산자이 메로트라 최고경영자(CEO)도 지난달 말 실적 발표에서 “신규 공장·설비 투자를 줄여 공급 과잉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 역시 투자를 보수적으로 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삼성의 핵심 캐시카우인 메모리 반도체 가격 하락세가 하반기에도 이어지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삼성은 지난 5월 반도체 등 미래 신사업을 중심으로 앞으로 5년간 450조원을 투자할 계획을 밝혔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당장 투자 축소 계획은 없지만, 경기 변화와 반도체 업황을 면밀하게 주시할 것”이라고 했다.
◇메모리 가격은 하락, 소재·설비 가격은 상승
한국 반도체의 주력 품목인 메모리 반도체(D램·낸드플래시) 가격은 최근 하락세다. 지난달 D램 가격은 작년 9월 고점과 비교해 20% 가까이 떨어졌고, 낸드플래시 가격은 전달보다 3% 떨어지며 11개월 만에 내림세로 돌아섰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는 3분기 D램 가격이 전 분기 대비 10%가량 하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도 영향을 받고있다. 지난 2분기(4~6월)에는 중저가 반도체 제품을 생산하는 8인치 파운드리 가동률이 90%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인텔 등에서 서버(대형 컴퓨터)용 칩셋 신제품 출시를 연기하는 것도 반도체 수요 창출을 가로막는 악재”라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반도체 소재·설비 가격은 오르고 있다.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특수가스 등을 공급하는 일본 쇼와덴코는 1년 새 가격을 12차례 올렸다. 최근 일본의 실리콘 웨이퍼(반도체 원판) 생산 업체인 썸코는 가격을 30% 올린다고 밝혔다.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회사인 ASML은 초미세 반도체 공정에 필수인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 납품가를 약 30% 인상한 2000억원대로 책정했다. 원화 약세(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 상승)까지 겹치면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체감하는 소재·장비 수입 부담은 더욱 커진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