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토박이인 판모(25·대학원생)씨는 “어릴 적엔 부모님이 사주신 LG TV와 삼성 스마트폰을 썼지만 지금은 중국산 TCL TV와 화웨이 폰을 쓴다”면서 “우리 또래에겐 한국 전자제품은 이제 추억의 제품”이라고 했다.
중국의 내수 강화 정책으로 한국 제품이 중국 시장에서 빠르게 밀려나고 있다. 한때 중국인들 사이에서 ‘고급 가전’의 대명사였던 삼성·LG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 정부가 대대적인 보조금 정책을 펼쳐 자국산 제품을 지원하면서 한국산이 설 자리를 잃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작년 말 중국사업혁신팀을 신설해 ‘중국 사업 재도약’을 목표로 뛰고 있지만 국내 산업계에서는 “한국 기업이 중국 시장에서 돈을 긁어모으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분위기다.
◇보조금 무기로 한국産 밀어낸 중국
한때 중국 시장에서 1·2위를 다투던 한국산 제품들은 8년 새 시장 점유율이 한 자릿수로 추락했다. 삼성전자 스마트폰은 2013년 중국 시장 1위(점유율 19.7%)였지만 작년엔 점유율 0.6%로 10위에 턱걸이했다. 같은 기간 삼성 TV는 6위(7.1%)에서 9위(4.1%)로, LG전자 OLED (유기발광다이오드) TV는 1위(94.2%)에서 4위(6.1%)로 중국에서 순위가 하락했다. 3위를 지켰던 현대·기아차는 아예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유독 중국에서 한국산이 맥을 못 추는 이유는 중국이 2010년을 전후로 내수 강화를 위해 자국 기업에 유리한 보조금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2009년 가전하향(家電下鄕·농촌 가전제품 소비 촉진) 정책, 2010년 이구환신(以舊換新·낡은 제품을 새 제품으로 바꾸면 보조금 지급) 정책을 펼치며 TV·냉장고 같은 가전 교체 시 10~13%의 보조금을 지급했다. 보조금 지급 대상은 중저가 제품으로 제한했다. 그 결과 중국 브랜드인 메이디·거리전기·하이얼 3강 체제가 형성됐다. 중국 정부는 올해도 농촌 지역 가전·가구·자동차 구매 보조금 지급을 추진 중이다.
현대·기아차도 중국의 보조금 공세 앞에서 경쟁력을 잃었다는 분석이다. 송선재 하나증권 연구원은 “중국 정부가 자국산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에 보조금을 몰아주고, 현대·기아차에는 현지 공장·설비 투자를 과도하게 늘리도록 압박하면서 현지 자동차 시장 구도가 빠르게 바뀌었다”고 했다.
중국의 보조금 공세는 한국이 17년간 세계 1위를 지켰던 디스플레이 분야도 뒤흔들었다. 중국은 작년에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 점유율 41.5%로 한국(33.2%)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그 원동력은 정부의 막대한 지원이었다. 중국 최대 디스플레이 기업 BOE(징둥팡)는 10년간 2조원에 달하는 보조금을 받았고, 생산 기지의 토지·건물·용수·전기도 대부분 무상으로 제공받았다. 안후이성에 지은 첫 LCD(액정 표시 장치) 공장은 투자비 460억위안(약 8조1700억원) 가운데 93.5%를 정부가 댔을 정도다. 덕분에 BOE는 원가를 삼성·LG디스플레이의 70% 수준으로 낮추며 시장을 잠식했다.
◇中추격 맞서려면 정부 보호막도 필요
한국의 대중 수출 30%를 차지하는 반도체도 중국은 보조금을 무기로 추격해 오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2014~2018년 글로벌 반도체 기업 21곳의 매출액 대비 정부 지원금 비중을 조사한 결과, 중국 기업인 SMIC(6.6%), 화훙(5%), 칭화유니(4%)가 1~3위를 차지했다. 중국은 미국의 반도체 제재 속에서도 중저가 파운드리(위탁 생산), 조립·패키징·테스트, 팹리스(반도체 설계) 분야에서는 글로벌 점유율과 매출 면에서 한국을 앞서고 있다. 한국의 대중 무역은 2019년부터 반도체를 빼면 적자인 상황이다. 중국의 반도체 경쟁력이 강화되면 대중 무역 적자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을 압도하는 기술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중국이란 거대 시장을 통째로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조철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은 중국을 앞서는 기술 분야를 끊임 없이 발굴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주영섭 서울대 특임 교수는 “보조금을 등에 업은 중국 기업들이 우리 기술을 따라잡는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며 “우리 정부도 대중 경쟁에서 기업과 함께 뛰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