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VR(가상현실) 기기를 쓰고 넷플릭스에서 시리즈물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화면 아래쪽에서 반짝반짝 알림 메시지가 뜬다. 3초 후 들리는 화면 속 비서의 목소리, “고객님의 관심 종목인 엔비디아가 17일 개장 직후 5% 이상 급등 중입니다. 클릭하시겠습니까?”
손의 움직임을 인식하는 핸드 트래킹(hand tracking) 기계를 들고 화면 속 지구본에서 깜빡이는 미국 지역을 클릭하자, 3D(3차원) 화면 한가득 엔비디아 추세선과 현재 호재 소식이 나타난다. 거래 증권사의 뉴욕 지점에 있는 PB(프라이빗뱅커)를 오른쪽 화면창으로 불렀다. “오늘 좀 사봐도 되겠어요?” “네 고객님.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로 그간 낙폭이 컸던 반도체 종목들이 추세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습니다.”
“엔비디아 100주 현재 가격에 매입”이라고 얘기하자 바로 거래가 체결되고, 바뀐 내 보유 종목 현황이 3차원 그래픽으로 떠올랐다. 미래에셋증권이 개발하는 VTS(VR Trading System·가상현실 거래 시스템)의 3~5년 후 모습이다.
◇HTS에서 MTS로, 다음은 VTS 시대
컴퓨터로 주식을 매매하는 HTS(홈트레이딩 시스템·1997년 첫 도입)와 휴대폰으로 거래하는 MTS(모바일 트레이딩 시스템·2010년 첫 도입)에 이어 VR·AR(증강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VTS 시대가 바짝 다가왔다. 국내 증권사 중 처음으로 미래에셋증권이 개발 중인 차세대 증권 거래 플랫폼 VTS를 미래에셋증권 여의도 IT센터에서 직접 체험해봤다.
컴퓨터에 깔린 VR 매매 앱을 켜고 VR 기기를 머리에 쓴 후 핸드 트래킹 기계를 양손에 쥐자, 마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오는 것처럼 3차원 넓은 화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현재 나의 자산 현황과 관심 종목, 보유 종목 시세 등락, 시장 상황 등이 손에 잡힐 듯 떠오른다. 기계를 쥔 왼손을 90도로 기울이자 손목에 시계가 나타나 현재 시각과 주요 알림 사항을 보여줬다. 핸드 트래킹 기계를 쥔 손을 ‘관심 종목’이나 ‘시장 상황’으로 이끌어 클릭하니 상세 내용을 담은 새로운 창이 펼쳐졌다. 관심 동영상을 동시에 실행시킬 수도 있다. 조만간 PB를 직접 불러오거나 음성으로 매매를 실행하는 기능, 또 핸드 트래킹 기계 없이 손가락 움직임만으로 화면을 조종할 수 있는 기능 등도 개발해 탑재할 계획이다.
최근 VR·AR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메타버스가 새로운 기술 트렌드로 떠오르자, 새로운 거래 플랫폼을 개발하기 위한 증권사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미래에셋은 이 기술을 3~5년 안에 현실에 접목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양상철 미래에셋증권 HTS개발팀 이사는 “구글·애플·메타 등 내로라하는 빅테크 기업들이 VR·AR 기기를 출시할 계획인데, 이런 기기의 성능이 향상돼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등과 결합하면 VTS 도입도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기기 대중화, 인증 문제 풀어야
MTS가 HTS를 따라잡는 데는 10년도 걸리지 않았다. 2010년 국내에 처음 도입된 MTS는 스마트폰 대중화와 함께 현재 개인 투자자 주식 매매 비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대세가 됐다. HTS까지 합치면 온라인 주식거래가 전체의 96%에 달한다.
지금도 증권사 직원이나 전업 투자자들은 여러 개의 모니터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수많은 경제·증시 관련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VTS는 헤드셋을 쓰면 보이는 가상현실 화면 속에서 수많은 정보를 한눈에 즉각 확인할 수 있다. 종목별 주가도 3차원 기둥 형태로 표출돼 변동 폭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업계에선 VTS 대중화까지 난제를 크게 두 가지로 꼽는다. 일단 쓰기 편리한 VR 기기가 얼마나 빨리 대중화되느냐의 문제다. 업계에선 가볍고 쓰기 편한 구글 글라스 형태의 VR 기기가 나온다면 대중화가 앞당겨질 걸로 보고 있다. 또 하나는 인증 문제. 게임이나 OTT 서비스는 아이디와 비밀번호만으로 로그인이 가능하지만, 주식 같은 금융거래는 본인 인증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양 이사는 “글라스 형태의 기기에 홍채 인식 기술을 넣어 본인 인증을 하는 식으로 문제를 풀어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박홍근 미래에셋증권 IT부문 대표는 “아이폰이 처음 나왔을 때 누구도 스마트폰이 이렇게 대중화될 줄 예견하지 못했듯 VTS도 미래 어느 시점에선 대세가 될 걸로 보고 그때를 대비해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