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모펀드 론스타가 30일(현지 시각) 외환은행 매각 건에 대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S)에서 일부 승소함으로써 20년간 이어진 론스타와 한국 정부의 악연이 세금 투입이라는 뼈아픈 대가로 귀결될 가능성이 커졌다.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는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46억7950만달러(약 6조3000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ISDS에 대해 “한국 정부는 론스타에 2억1650만 달러(약 2800억원)와 이자(만기 1개월 미 국채 금리 기준)를 배상하라”고 판정했다.
1990년대 말 외환 위기로 불거진 외환은행 부실 사태는 당시 한국의 미숙한 자본시장, 명분에 치우쳐 목소리를 높인 정치권, 책임 회피에 몸을 사린 금융 당국 등의 부실한 대처로 한국 경제사(史)에 적잖은 상처를 남기며 일단락되게 됐다. 정부는 론스타 측 청구 금액의 약 4.6%가 인용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세금으로 미국 사모펀드에 손해배상을 하게 된 데 대한 책임 공방은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다.
◇론스타-정부 20년 악연, 세금 투입으로 마무리
‘론스타 ISDS 사태’는 2003년 외환은행을 샀다가 2012년 하나은행에 매각한 론스타가 2012년 ICSID에 “한국 정부가 매각 승인 결정을 늦춰 손해를 입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하면서 촉발됐다. 론스타는 외환은행을 1조4000억원에 인수하고 나서 이를 하나금융에 매각하면서 약 4조7000억원(배당 포함)을 챙겼다.
부실한 기업을 싸게 사들인 후 단기간에 이를 비싸게 팔고 막대한 이익을 보는 투기자본을 뜻하는 ‘벌처펀드’(vulture fund)의 전형적인 기법이었다. 당시 미국에선 이미 널리 퍼진 투자 방식이었지만, 자본시장이 미숙했던 한국엔 이와 같은 대규모 기업 인수·합병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 사모펀드 등이 없었다.
외환위기 직후 한국엔 폭락한 원화 가치와 급락하는 자산 가격을 본 벌처펀드가 대거 진출했는데, 결국 굴지의 은행까지 외국 자본에 넘어가게 된 셈이다. 당시 매각 협상에 참여했던 관료들은 “해외 자본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는 입장이었다.
◇2004년부터 정치권 ‘론스타 때리기’
론스타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여야를 망라한 정치권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2006년, 시민단체를 필두로 정치권까지 정부의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를 승인했음에도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뿐 아니라 여당인 열린우리당까지 론스타 때리기에 나섰다. 시민단체인 ‘투기자본감시센터’가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등 매각에 관여한 경제 관료 20명을 경찰에 고발했다. 국회에선 “국민 혈세가 투입된 금융기관을 외국계 기업에 헐값으로 팔아넘긴 것은 일제시대 친일행위와 다름없다”(최경환 당시 한나라당 의원) 같은 발언이 터져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2006년 3월 국회 재경위는 여·야 공동으로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을 검찰에 고발했다. 변양호 전 원장은 구속돼 재판을 받다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책임을 지는 관료가 사라졌다는 뜻의 ‘변양호 신드롬’이란 표현이 탄생했다.
한국 정부는 2007년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영국계 은행 HSBC에 매각하려 했을 때 승인하지 않았다. 정부는 론스타가 싼값에 외환카드를 흡수합병하려고 허위 사실을 퍼뜨려 외환카드 주가를 떨어뜨렸다는 혐의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므로, 결과를 먼저 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2011년 대법원은 이 혐의가 유죄라고 판결했다.
결국 HSBC는 2008년 9월 외환은행 인수에서 손을 뗐다. 론스타는 한국 정부의 방해로 매각이 무산됐다고 주장하지만, 많은 자본시장 전문가들은 당시 글로벌 금융 위기 발생으로 더 좋은 금융사 ‘매물’이 쏟아지자 HSBC가 마음을 바꿨다고 보고 있다.
이후 4년을 더 끈 외환은행 매각은 2012년 1월 금융 당국이 하나금융의 외환은행 인수를 승인하면서 끝났다. 론스타는 결과적으로 돈을 벌었지만, HSBC가 외환은행을 사려고 한 가격(약 6조원)보다 싼값(약 4조원)에 팔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한국 자본시장이 성숙한 수준에 오른 지금 같은 환경이라면 부실 금융사에 국내 민간 자본을 투입해 정리할 수 있겠지만, 당시 상황은 론스타 외에 대안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급박했다”며 “론스타 사건을 계기로 얻은 교훈도 많으나 소모적 책임 공방과 세금 투입 등 상처도 많아 아쉬움이 큰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