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설립된 신생 사모집합투자기구(PEFㆍ사모펀드) A사는 중국 수출에 주력하는 화장품 업체에 투자하기 위해 프로젝트 펀드 조성에 나섰지만 올해 상반기 내내 1000억원대 목표액을 달성하지 못했다. 금리가 급등하면서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자 투자계의 ‘큰손’인 각종 공제회와 은행, 캐피털 등 금융권이 지갑을 닫았기 때문이다. A사 관계자는 “한한령이 심각하던 시기에도 해외에서 인기가 높았고 작년에도 수십% 매출 성장을 이룬 회사여서 무난하게 투자 자금을 모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자본시장이 예상보다 훨씬 얼어붙은 것 같다”고 말했다.

글로벌 금리 인상과 부동산·주식 등 자산시장 약세가 이어지면서 투자 업계에 한파가 불고 있다. 인수·합병(M&A)과 대형 부동산 거래가 줄어들며 업계에서는 “딜(deal·거래)이 사라졌다”는 말이 나온다.

◇대규모 PEF도 자금 모집 안 돼

11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PEF 신규 약정액은 6조8501억원으로 작년 하반기(11조8427억원)의 거의 절반 수준으로 급감했다. 올해 연간 실적은 사상 최대치였던 지난해 수준(약 19조원)에 크게 못 미칠 전망이다.

올 들어 주식·채권 등으로 손실을 본 기관들은 PEF 출자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큰손인 국민연금은 올해 PEF에 5000억원, 벤처펀드(VC)에 1500억원, 총 6500억원을 출자했다. 지난해에 비해 1000억원 줄어든 규모다. PEF 재원의 한 축을 담당해온 캐피털 업계에서도 올해는 KDB캐피탈, IBK캐피탈, 신한캐피탈 등 3대 캐피털사만 지난해만큼 출자에 나섰다. 한 사모펀드 관계자는 “지난해에 ‘오징어게임’ 등 K콘텐츠가 뜨면서 콘텐츠 제작 기업에 투자하는 딜을 가지고 기관투자자들을 찾아다녔는데 ‘곳간이 비었다’고들 하더라”며 “아예 신규 PEF 투자 건은 가지고 오지 말라는 곳도 있을 정도”라고 했다.

펀드 조성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대형 PEF들도 마찬가지다. 국내 3대 PEF인 IMM PE는 상반기부터 2조6000억원 규모의 신규 펀드 결성에 나섰지만 지난달 말까지 7000억여 원을 모집하는 데 그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워낙 대형 펀드여서 1년 정도는 걸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출자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1차 결성 시점을 내년 이후로 미룬 것으로 안다”고 했다.

◇자금 안 돌자 기업 인수합병 거래 30% 감소

국내 M&A 시장의 경우 지난해 상위 20건 중 기관 전용 PEF 참여 비율이 85%에 달할 정도로 PEF의 영향력이 크다. 그런데 올 들어 PEF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M&A 시장도 얼어붙었다. 배달 대행 플랫폼 ‘부릉’의 운영사 메쉬코리아는 올해 초부터 매물로 나왔지만, PEF 업계가 난색을 표하면서 경영권 매각이 지연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최대 1조원의 가치가 있다는 분석이 나와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이 넘는 스타트업) 기대주로 꼽혔으나 매각 지연으로 몸값도 떨어지고 있다.

M&A 시장은 전 세계적으로 침체됐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글로벌 M&A 건수는 지난 10일 기준 3만62건으로 지난해(4만2985건)에 비해 30% 감소했다. 같은 기간 거래 금액은 5조800억달러에서 2조7700억달러로 45% 줄어들었다.

◇도심 상업용 부동산 대형 딜 잇따라 무산

대형 부동산 거래도 표류하고 있다. 올해 국내 상업용 부동산 시장의 최대 관심사였던 서울 여의도 국제금융센터(IFC)의 경우 우선 인수 협상 대상자로 선정됐던 미래에셋자산운용이 매매 협상을 중단했다. IB(투자은행) 업계 관계자는 “올해 상반기와 비교할 때 금리가 올라 재무 부담이 커진 데다 인수 가격도 너무 높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는 점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서울 서소문에 있는 동화빌딩 매각에 나섰던 마스턴투자운용은 최근 시티코어·NH투자증권·삼성SRA자산운용 컨소시엄의 인수 우선 협상자 지위를 박탈했다. 이 컨소시엄이 지난 7월 3100억원에 사들이기로 했지만, 이후 금리가 오르자 200억원가량 가격을 낮춰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옛 금호아시아나 사옥인 광화문 콘코디언빌딩도 원래 7000억원 안팎에 매물로 나왔지만, 흥행에 실패하자 매각 가격을 6800억원가량으로 낮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