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달러화와 일본 엔화 일러스트레이션./로이터 연합뉴스

18일 뉴욕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이 장중 149엔까지 상승(엔화 가치 하락)해 32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심리적 마지노선인 ‘달러당 150엔’이 무너질 경우, 경제 전반이 급격하게 악화될 수 있다는 공포가 일본 경제계에 확산되고 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이날 뉴욕 외환시장에서 엔화는 달러당 148엔대에 머무르다가 149엔을 넘어서 거래되기도 했다. 엔·달러 환율이 149엔대에 올라선 것은 일본의 ‘버블 경제’ 시기인 1990년 8월 이후 처음이다.

국제 외환시장에서는 엔화 가치의 하락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고, 일본 외환 당국의 구두 개입이 아무런 효과가 없는 상황이라 조만간 150엔이 무너지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상은 이날 “투자 등에 따른 과도한 변동이 있다면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외환시장 개입까지 경고했다.

엔화의 추락은 달러만 독주하는 ‘킹(king) 달러’ 현상이 가져오는 통화 가치 불균형으로 세계 경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신호라는 점에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세계 3위 경제 대국인 일본이 기록적인 엔저로 흔들리는 데다, 세계 5위(2021년 기준) 영국도 감세안 파동으로 최근 국채 투매와 파운드화 폭락 사태를 겪는 등 선진국들마저 휘청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세계 경제의 침체가 가속화해 글로벌 경기가 경착륙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엔화 가치 올해 30% 폭락

일본 경제는 구조적인 위기 국면에 빠졌다고 볼 수 있다. 엔화 가치 추락 폭이 다른 선진국 통화보다 큰 데다, 막대한 무역 적자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 경쟁력 저하로 제조업 기반이 약해졌고, 성장을 가로막는 고령화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엔화 값 폭락을 계기로 이 같은 일본 경제의 갖가지 고질병이 부각되고 있다.

올 들어 17일까지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29.5%나 하락했다. 같은 기간 원화가 20.7%, 유로화가 14.8%씩 가치가 떨어진 것보다 하락 폭이 크다. 최근 통화 가치 폭락이라는 홍역까지 치른 영국 파운드화가 15.6% 하락한 것과 비교하면 엔화의 추락은 단연 두드러진다.

엔화 가치 하락의 가장 큰 이유는 달러화 초강세에도 불구하고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인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저성장이 오래 지속되고 있는 일본에서는 글로벌 인플레이션 영향이 적다는 이유로 경기 부양을 위해 일본은행이 ‘제로(0) 금리’를 고수하고 있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 /교도 연합뉴스

이렇다 보니 엔화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달러로 구입해야 하는 원유·원자재·곡물을 수입하느라 막대한 무역 적자가 발생하고 있다. 올해 8월 일본의 무역 적자는 1979년 이후 월간 단위로는 역대 최대 폭인 2조8173억엔(약 26조9000억원)에 달했다. 또 8월까지 13개월 연속 무역 적자를 기록 중이다. 2015년 2월까지 32개월 연속 무역 적자를 이어갔을 때에 이어 둘째로 긴 무역 적자가 이어지고 있지만, 올해는 적자 폭이 훨씬 크다. 올 들어 8월까지 누적 무역 적자는 12조1336억엔(약 116조원)에 달한다.

일본 도쿄시내 한 중개소 밖 전광판에 엔·달러 환율이 표시되고 있다.

◇'엔저=한국 수출에 불리’ 공식 성립 안 해

과거에는 엔저가 두드러질 때마다 일본 수출 기업들이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 수출이 확대되기도 했지만 올해는 이런 효과를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 대기업들이 생산 시설을 대거 해외로 옮긴 데다, 달러 외에 다른 선진국 통화도 평가절하됐기 때문에 엔저가 수출에 도움이 되기 어려운 상황이라서다.

엔저가 한국 경제에 미치는 직접적인 충격도 예전만 못하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경쟁 상대인 우리나라 기업들의 수출이 제약받았지만, 최근에는 이런 현상이 크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킹 달러’ 국면에선 원화와 엔화가 나란히 달러 대비 평가절하되고 있어 엔저의 영향을 체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 대국 일본이 침체에 빠질 경우 세계 경제에 충격을 줄 수 있고, 이럴 경우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악재로 작용하게 된다.

이지평 한국외국어대 특임교수는 “기시다 후미오 내각이 엔저를 발판으로 삼겠다며 대대적으로 수출 진흥 정책을 펴면 경쟁 상대인 한국 기업 중에서 악영향을 받는 사례가 나올 것”이라며 “엔저가 지나쳐 글로벌 금융시장의 안정성을 해치게 되면 아시아 신흥국들이 위기에 빠질 가능성도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