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3일 팀 쿡 애플 CEO(최고경영자)는 트위터에 일본 구마모토의 한 초등학교를 방문한 사진과 함께 “소니는 세계 최고 카메라 센서를 만들어온 애플의 파트너사”라고 올렸다. 구마모토는 대만 TSMC와 소니가 공동 투자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공장을 짓는 곳으로, TSMC는 이곳에서 세계 이미지 센서 시장 1위인 소니 제품을 생산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지 센서는 시장 2위 삼성이 특히 주력하는 분야로 미국(애플)과 일본(소니), 대만(TSMC)이 협력 관계를 맺어 삼성을 견제하겠다는 뜻이다.

지난달 6일 TSMC 미국 애리조나 공장의 장비 반입식도 대만·미국의 기술 동맹을 과시한 현장이었다. 이날 행사장에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관계 최고위 관계자들은 물론, 팀 쿡, 엔비디아 젠슨 황, AMD 리사 수 등 미국 주요 빅테크 CEO가 총출동했다.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낸시 펠로시 전 미국 하원의장이 지난해 8월 대만을 방문해 마크 리우 TSMC 회장을 만난 것도 TSMC가 미국 기술 안보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美엔비디아 CEO와 대화하는 TSMC 회장 - 지난달 6일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에 세워진 TSMC 공장의 장비 반입식에서 마크 리우(왼쪽) TSMC 회장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날 TSMC는 400억달러를 투자해 미국에 제2반도체 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미국과 대만, 일본의 ‘반도체 동맹’이 갈수록 탄탄해지는 가운데 한국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만은 2021년에 미국, 일본과 반도체 협력을 한다고 선언했고, 미·일도 지난해 반도체 기술 동맹을 맺었다. 미국이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위해 한국, 대만, 일본과 함께 ‘칩4′를 내세웠지만 이 속에서 유독 한국은 적극적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대만·일본이 형성하는 반도체 밸류체인(가치 사슬)에서 한국의 역할이 어정쩡하다고 말한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 일본은 장비, 대만은 첨단 위탁 생산에 강점을 보이고 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반도체 전문가인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는 “파운드리보다 메모리 반도체에서 우위에 있는 삼성전자는 미국·대만·일본이 만드는 반도체 공급망에서 연결 고리를 파고들 틈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팀 쿡 애플 CEO가 지난달 방문한 구마모토는 TSMC와 소니가 손잡고 지난해부터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는 지역이다. TSMC와 소니는 각각 70억달러(약 8조2579억원)와 5억달러를 투자해 구마모토 반도체 공장 운영 주체인 ‘JASM’을 공동으로 설립하고 소니는 합작사 지분 20%를 갖는다. 여기선 구형 공정에 해당하는 12~28나노미터(㎚·1나노는 10억분의 1m) 공정의 반도체 제품을 생산한다. 소니의 주력 제품인 카메라용 이미지 센서와 차량용 제어 반도체 마이크로컨트롤러(MCU)가 대상이 될 전망이다.

대만 TSMC는 미국·일본과 동맹 체제 강화에 총력을 쏟고 있다. 중국과 안보 갈등을 빚고 있는 미국·일본과 삼각 체제 구축을 통해 글로벌 점유율과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뜻이다. 애플·구글·엔비디아 등 미국 빅테크 기업과 일본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의 경쟁력에 TSMC의 반도체를 결합해 한국과 격차를 더 벌리겠다는 것이다. 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주요 메모리 반도체의 생산 기지를 중국에 두고 있는 데다 중국 판매 비율도 높아 반(反)중국 동맹에 선뜻 나서기 힘든 국면이다. 삼성은 전체 낸드플래시 반도체의 30~40%를 중국 시안에서, SK하이닉스는 전체 D램의 절반가량을 중국 우시에서 생산하고 있다.

◇IT 부활 꿈꾸는 일본 뒤에 대만이 있다

TSMC가 일본에 공장을 짓는 것은 삼성 견제 외에도 전기차의 등장과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자동차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다목적 포석이다. 일본에는 세계 최대 자동차 기업인 도요타 외에도 닛산·혼다 등 수요처가 충분한 데다 자동차용 반도체 생산 기업은 르네사스 외에 뚜렷한 경쟁자가 없다. TSMC는 일본과 동맹을 통해 단숨에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 실제로 구마모토 공장에는 일본의 세계적 자동차 부품 업체 덴소도 출자했다. 덴소는 400억엔(약 4100억원)을 출자해 10% 넘는 주식을 취득했다. 일본이 자랑하는 소재·장비 기업과의 유대도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일본은 2000년대 들어 반도체, 스마트폰 등 핵심 IT(정보기술) 산업에서 삼성에 줄줄이 밀려왔지만, TSMC와 협력을 계기로 부활을 꿈꾸고 있다. 지난해 하기우다 고이치 일본 경제산업상은 미국을 방문해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과 반도체 분야 협력 추진 약속을 받아냈다. 이를 계기로 지난달 IBM과 일본 반도체 회사 라피더스는 2027년까지 2나노 공정 개발·생산을 위해 손을 잡았다. TSMC 공장의 일본 유치에도 정부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일본 정부는 TSMC가 이바라키현에 반도체 연구개발 거점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총사업비 370억엔(약 3500억원) 중 절반을 부담했다. 또 TSMC와 소니의 반도체 공장 건설 비용의 40%에 해당하는 4000억엔(약 3조8000억원)도 보조금으로 지원한다. 첨단 반도체 공장을 주로 국내에 짓는 삼성은 각종 인허가 처리와 보조금 등 경쟁에서 크게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

◇TSMC 미국 투자 규모 삼성의 2배

TSMC는 지난달 미국 반도체 투자 규모를 당초 계획의 3배 이상인 400억달러(약 52조원)까지 확대한다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짓는 반도체 공장 투자비(170억달러)의 두 배가 넘는 금액이다. TSMC의 핵심 고객들인 애플과 엔비디아, AMD 등 팹리스(반도체 설계) ‘큰손’들은 TSMC의 미국산(産) 반도체 생산을 환영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TSMC와 삼성의 시장점유율 격차가 더 커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세계 10대 팹리스 업체 중 7개를 보유한 미국은 TSMC 공장을 자국에 유치하고, 일본과 협력을 통해 반도체 제조 장비와 핵심 소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면서 국제 정세에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 중이다.

전문가들은 TSMC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최악의 상황에서도 오히려 지정학적 위기를 이용해 실익을 취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미국, 일본에 공장을 세워 중국 공격의 리스크(위기)를 분산시키고 안정적인 공급망을 내세워 미·일 고객사도 더 많이 확보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반도체 수요가 늘면서 향후 대만 내 생산 설비와 인력이 이를 모두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며 “미국, 일본 정부의 지원 아래 미래의 공장과 인력을 미리 확보해놓은 셈”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