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성규

증권거래소를 엄격하게 통제해온 중국 정부가 ‘기업공개(IPO) 허가제’를 등록제로 대체하는 것을 포함한 대대적인 시장 개혁에 나섰다. 증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대폭 축소해 증시 상장 문턱을 크게 낮춘 것이다. 코로나 봉쇄 여파, 미국의 거센 대중 규제에 막혀 위기에 처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미국·홍콩 증시로 눈을 돌리던 자국 빅테크 기업들의 본토 상장을 유도하기 위한 조치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17일 중국 증권감독관리위원회(CSRC·이하 증감위)와 증권거래소, 증권예탁결제원 등은 기업공개(IPO) 등록제에 관련된 신규 규정 165개를 발표했다. 이 중 핵심은 대륙판 나스닥인 ‘커촹반’ 등에 시범 적용했던 등록제를 증시 전체로 확대 적용하는 대신 기존 IPO 허가제를 폐지하고 상장 요건도 완화한다는 것이다. 중국 당국은 지난 1일 관련 입법예고안을 발표한 이후 단 보름여 만에 새 규정을 초스피드로 발표하고 실행에 들어갔다. 자본시장 부흥이 그만큼 시급하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상장 요건 낮추고, 검토 시간 줄여

그간 중국 빅테크 기업들은 자국의 깐깐한 상장 심사를 피해 홍콩 또는 미국 증시에 상장해왔다. 알리바바·바이두·텐센트가 대표적이다. 중국의 간판 증시인 상하이증권거래소나 선전증권거래소에 상장하려면 증권감독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데, 여기에 보통 2~3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중국 당국은 이번 개혁안에서 IPO 심사 권한을 증감위에서 각 거래소로 이관하고 “늦어도 3개월 내에 검토를 완료하라”고 주문했다.

상장 문턱도 대폭 낮아졌다. 기존 허가제에선 ‘최근 3년간 영업이익을 내고 영업이익이 누적 3000만 위안(약 57억원) 이상’인 기업만 상장 신청이 가능했다. 시장 선점을 위한 투자로 인해 적자가 불가피한 테크 기업들은 상장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중 당국은 기업 가치가 50억 위안 이상인 기업의 경우 지난 1년간 6억위안 이상의 매출에 영업이익을 창출하면 상장 신청을 할 수 있도록 요건을 대폭 완화됐다. 1년만 적자를 면하면 상장을 통해 자금을 수혈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다.

‘따상’(상장 첫날 주가가 공모가의 배로 뛰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던 주가 변동 폭 규제도 완화됐다. 이전까지 중국 증시에선 신규 상장을 해도 하루 주가 변동 폭이 상하 10% 이내로 엄격하게 제한됐다. 한국이나 미국 증시와 달리, 유망 주식의 상장 첫날 투자자들이 대박을 터뜨릴 수 없고, 기업들도 대규모 자금 수혈이 힘든 구조였다. 중 당국은 이번에 “상장 후 첫 5거래일에는 주가 변화 폭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6일째부터는 다시 상하 10% 이내로만 주가 변동이 제한되지만, 상장 초기 주가에 대한 족쇄를 풀어준 것이다.

◇디디추싱·앤트그룹…대어 상장할까

중국 내에선 벌써부터 ‘증시 상장이 늘어나며 시장에 활기가 돌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지난해 중국 증시에선 까다로운 상장 조건과 불황이 겹치며 한 해 동안 상장한 기업이 428곳에 그치며 전년 대비 18.3% 감소했다. 중국 경제 전문 매체 상보는 “이번 개혁안이 발표된 후 일주일 만에 16개 기업이 상장 신청을 했다”고 보도했다.

미 증시에서 상장폐지된 디디추싱이나 홍콩 증시에 상장하려다 제동이 걸렸던 앤트그룹의 본토 상장 가능성도 점쳐진다. 디디추싱은 미국 2021년 뉴욕증시 상장 당시 44억 달러를 모금했던 중국 최대 승차공유 업체고, 앤트그룹은 300억 달러 규모의 당시 세계 최대 IPO가 예상됐던 중국 최대 핀테크 업체다. 미국에서 각종 규제에 직면한 짧은 동영상 앱 ‘틱톡’의 모회사 바이트댄스도 대어 중 하나로 꼽힌다. 중 당국이 개혁의 효과를 선전하기 위해 이들을 포함한 빅테크에 혜택을 제시하며 상장을 적극 유도할 것이라는 얘기다.

미국에 상장된 중국 테크 기업들의 ‘회귀’ 바람도 거세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미중의 대립이 거세지면서 미국에 상장돼 있는 중국 기업들은 미국 증권 당국의 조사와 규제에 시달리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미국 증시에 상장된 250여 개 중국 기업 중 128개가 상장폐지 임시 명단에 들기도 했다. 중국 증권가에선 “미중 관계가 악화되면서 중국 기업들이 홍콩 상장을 많이 선택해왔는데 이제 본토 증시도 하나의 선택지가 되는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