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정부가 21일 완화된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 세부 규정을 발표하면서,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서는 “그나마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는 반응이 나왔다. 미국이 자국 주도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나서면서, 인건비·건설비 등이 비싼 미국에 투자하려면 반도체 보조금 수령이 필수적인데 이를 받으면 핵심 시장인 중국 내 공장에 10년간 투자를 금지한다는 ‘독소 조항’이 있어 그간 국내 기업들은 전전긍긍해 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현재까지 각각 중국에 33조원, 35조원 이상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기술의 미국’과 ‘시장의 중국’ 사이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번 세부 규정 발표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운신의 폭이 일정 부분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양국 정부 협상을 통해 불확실성이 점차 해소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성과”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21일 ‘반도체 지원법’에 따라 보조금을 받는 기업이 10년간 중국에 반도체 투자를 못 하게 한 소위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의 세부 규정을 발표했다. 국내 반도체 업계 우려와 달리 중국 내 생산 설비 유지와 일정 부분 확장도 가능한 것으로 파악됐다. 중국 산시성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삼성전자

◇예상보다 제한 규정 완화

중국은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핵심 생산 기지다. 현재 삼성전자는 중국 낸드플래시의 40%를, SK하이닉스는 D램의 40%와 낸드의 20%를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서 128단 낸드플래시를,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와 다롄에서 각각 10나노 중·후반대 D램과 96·144단 낸드플래시를 생산하고 있다. 기술 유출 등을 우려해 업계 최첨단인 230단 낸드플래시와 10나노 초반대 D램보다는 기술 수준이 낮은 제품을 중국에서 생산 중이다.

미 정부의 가드레일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생산하는 제품은 최첨단은 아니지만, 대부분 구형(legacy) 공정 이상이기 때문에 ‘10년 내 5% 확장’ 규정이 주로 적용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 내 공장의 생산 능력을 향후 10년간 웨이퍼(반도체의 원재료인 둥근 원판) 기준 5% 이내 범위에서 확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5%를 초과할 경우 10만달러 이내에서만 투자할 수 있다. 첨단 미세 공정으로 갈수록, 웨이퍼 한 장당 얻을 수 있는 반도체의 양이 크게 늘며 생산성이 급격히 향상되는 것을 감안하면 ‘5% 제한’은 사실상 의미가 크지 않다는 해석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기술이 고도화되면 웨이퍼당 생산량이 늘어나기 때문에 실제 반도체 기업들의 여유는 더 많을 것”이라며 “결론적으로 한국 기업들에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미 정부는 별도로 낸드플래시의 층수를 제한하는 조항도 두지 않았다. 낸드플래시 반도체는 아파트처럼 데이터 저장 공간을 수직으로 높이 쌓을수록 성능이 뛰어나다. 또 미 정부는 지난해 1년간 유예 조치를 내린 중국 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공장 대상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에 대해서도 한국 정부와 추가 연장을 협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숨 돌려, 추후 상황은 더 지켜봐야”

메모리 반도체 한파로 1분기에만 3조~4조원대 적자를 떠안게 된 국내 반도체 업계는 큰 고비를 넘겼다는 반응이다. 만약 중국 내 설비 투자가 불가능해지면 향후 수년 내 중국 생산 물량을 대체할 대규모 생산 시설을 추가로 지어야 하는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인텔에서 인수한 중국 다롄 낸드플래시 공장 때문에 더 위기에 몰려있는 상태다. 작년에 1차 대금으로 70억달러(약 9조1000억원)를 냈고, 2025년 잔금 20억달러를 내야 하지만 공장을 제때 업그레이드하지 못하면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질 상황이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일단 가드레일 조항에선 국내 기업에 우호적인 내용이 나왔지만, 여전히 미국 반도체 공장 투자는 국내 투자보다 인건비, 건설비 등이 많이 드는 데다 예상 초과 이익 환수, 경영 기밀 공개와 같은 독소 조항이 여전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양국 간 협의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