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이 지난 9월 20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DC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에서 열린 FOMC 회의 후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EPA 연합뉴스

세계 채권시장의 지표금리(벤치마크) 역할을 하는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가 3일(이하 현지 시각) 글로벌 금융 위기 직전인 2007년 8월 이후 최고 수준으로 급등한 데는 이날 발표된 지표 하나가 결정적 계기가 됐다. 미 노동부는 이날 구인·이직보고서(JOLTs)를 내고, 8월 미국 민간 기업 구인 건수가 961만건으로 집계됐다고 발표했다. 이는 시장 예상(880만건)을 뛰어넘는 수치인 데다, 지난 4월 1032만건을 찍은 이후 5월(962만건)과 6월(917만건), 7월(892만건)에 차차 감소세를 보이다 다시 반등한 것이다.

굳건한 노동시장은 미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지금의 높은 금리를 섣불리 낮출 수 없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근거로 작용해왔다. 식어가는 줄 알았던 미국 노동시장이 여전히 강하다는 사실이 재차 증명되자, 경기 침체와 금리 인하를 예상했던 투자자들이 채권을 일제히 내던지는 상황이 온 것이다.

◇美 나 홀로 호황이 부른 고금리

작년 3월 연 0~0.25%였던 미국 기준 금리는 올해 7월 5.25~5.50%로 올랐다. 1년 5개월 사이 금리를 5.25%포인트나 높인, 연준 역사상 가장 가파른 인상이었다.

기준금리가 급등하면 대출 금리가 올라 가계와 기업 이자 부담이 커지고, 경기가 고꾸라진다는 게 정설. 많은 경제학자와 전문가들이 “미국 경제에 허리케인이 몰려온다”며 경착륙을 예견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반대에 가깝다. 고용시장에선 여전히 기업들이 월 1000만명에 가까운 구직자를 찾느라 분주하고, 실업률은 역사적 저점인 3%대에 머물고 있으며, 물가도 여전히 목표치(2%)보다 높은 3% 후반이다.

기준 금리 급등 속에서도 굳건히 버텨내는 미국 경제의 ‘나 홀로 호황’이 금융시장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연준이 지금의 높은 기준금리를 상당 기간 낮추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 속에 달러화 가치가 오르고 엔화·원화 등 다른 통화 가치는 급락하는 중이다. 다른 한편으로 미 국채 금리가 급등하면서 이를 기준으로 삼는 다른 나라 시장 금리까지 올라가는 연쇄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픽=양진경

연준은 지난달 20일 기준 금리를 동결하면서도 올해 미 경제성장률 전망을 종전 1.0%에서 2.1%로 두 배 넘게 높이고, 내년 성장률 눈높이도 1.1%에서 1.5%로 올려 잡았다. 그러면서 내년 말 기준 금리 전망치를 종전 4.6%에서 5.1%로 0.5%포인트나 올렸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은 지난 2일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내가 작년에 5%대 금리가 올 것이라고 얘기했을 때도 사람들이 ‘정말이냐’고 반문했다”며 “이제는 7% 금리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재정 적자, 채권 발작 부추겨

이날 채권 금리를 자극한 또 다른 뉴스는 공화당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 전격 해임 소식이었다. 매카시는 바이든 대통령과의 협상 끝에 미국 연방정부 부채한도 유예법안을 통과시킨 인물로, 매카시 해임 배경에는 정부의 대규모 재정 적자를 둘러싼 미 정치권의 뿌리 깊은 갈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 국가채무는 올 6월 말 기준 32조3323억달러(약 4경4050조원)에 달한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며 재정 적자가 급격히 불어났다. 고질적 재정 적자는 지난 8월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가 미국 국가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한 계단 강등한 원인이기도 하다. 올 하반기에도 재무부가 1조8600억 달러의 국채를 찍어낼 계획이다.

하지만 미 국채 공급은 늘어나는데 수요는 줄어드는 게 문제다. 일단 미 국채 ‘큰손’이던 중국과 일본이 최근 미 국채 매도를 이어가고 있다. 일본은 엔화 약세 방어를 위해, 경기침체 얘기까지 나오는 중국 역시 위안화 약세를 막기 위해 미 국채를 팔아치우고 있다. 게다가 미 국채 최대 매수자였던 연준이 금리 인상과 함께 양적긴축(QT·중앙은행이 보유한 채권을 내다 파는 방식으로 시중 자금을 거둬들이는 통화 정책)에도 나서면서 미 국채는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진 상황이다.

‘채권왕’ 빌 그로스, 유명 헤지펀드인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설립자인 레이 달리오, 억만장자 투자자 빌 애크먼 등은 일제히 미국채 10년물 금리가 조만간 5%도 넘어설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모건스탠리의 마이크 윌슨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대규모 재정 적자가 미국 경제가 침체로 가는 것을 막았지만, 이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