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와 경기 둔화로 비교적 금리가 낮은 정책상품 대출도 갚지 못하는 서민이 늘면서 올 들어 보증기관이 대신 갚아준 대위변제 금액이 10조원을 넘었다. 연말까지 지난해의 2배를 넘을 것으로 보인다. 대위변제는 은행 대출자가 갚지 못한 돈을 보증을 선 정부나 공공기관이 대신 갚아주는 것을 말한다. 반면 은행들은 정부 보증 덕에 큰 손실을 입지 않은 채 역대급 이자 이익을 올리고 있어 은행의 사회적 책임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기 부진으로 대위변제 급증
3일 더불어민주당 오기형 의원이 주택도시보증공사(HUG)·신용보증기금 등 보증사업을 하는 13개 공공기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1~10월 대위변제 총액은 10조1529억원에 달한다. 이는 지난해 연간 합산액(5조8297억원)보다 74% 늘어난 것이다. 11~12월 금액까지 더할 경우, 올해 대위변제액은 지난해의 2배 수준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기관별로는 서민들의 전세대출을 보증하는 HUG의 올 1~10월 변제액이 3조5742억원으로, 작년 연간 변제액(1조581억원)의 3배를 넘어섰다. 올해 서울·인천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대규모 전세 사기가 터지면서 세입자가 집주인으로부터 돌려받지 못한 전세보증금을 HUG가 대신 내어준 경우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고금리와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은 영세 자영업자나 소상공인과 관련된 대위변제도 크게 늘었다. 은행의 소상공인 대출을 보증하는 신용보증기금의 대위변제액은 작년 1조3599억원에서 올 1~10월 1조7493억원으로 증가했고, 같은 기간 지역신용보증재단의 대위변제액도 5076억원에서 1조3703억원으로 급증했다. 이 밖에 서민금융진흥원(3825억원), 기술보증기금(2575억원) 등도 대위변제액이 급증했다.
◇서민 정책상품으로도 돈 버는 은행
서민 고통과 공공기관 손실은 커지지만, 정작 정책 상품을 판매하는 은행은 별 손해를 보지 않는다. 대출 부실이 발생할 경우 보증을 선 공공기관들이 대출금의 90~100%를 대신 갚아주기 때문이다. 은행은 서민이 돈을 갚으면 이자를 벌고, 못 갚아도 보증 기관이 대신 갚아주기 때문에 손해를 거의 보지 않는 구조다.
서민 대상 상품의 보증 비율은 대부분 90~95%를 넘고, 올해 수조원대 피해가 발생한 전세대출은 HUG가 100%를 갚아준다. 신용보증기금 관계자는 “소상공인 대출의 경우 원금은 물론 이자 미납액까지 합쳐 보증 비율이 95%에 달한다”고 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금융권 가계대출 중 보증부대출은 2013년 44조2000억원에서 올해 9월 263조5000억원으로 약 6배 증가했다. 이 중 95%인 250조3000억원이 은행권 대출이다.
은행권은 “보증기관에 출연금을 내기 때문에 ‘공짜’는 아니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은행권 보증부 대출의 4분의 3 이상을 차지하는 국내 5대 은행이 올해 1~10월 보증기관에 출연한 기금은 1조9000억원으로 같은 기간 대위변제액(10조1529억원)의 18.7%에 불과하다.
서민 상품에서도 수익을 올리다 보니 은행들의 이자 이익은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역대 최대인 56조원의 이자 이익을 올린 국내 은행들은 올해에도 60조원에 달하는 이익을 올릴 것으로 추정된다. 비판이 거세지면서 은행들은 서민 상품의 이자 중 일부를 돌려주는 페이백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은행들이 손해도 안 보고 서민 대출을 해주는 것은 기여라고 볼 수 없다”며 “정책 상품에 대한 은행의 책임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