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시작된 고물가가 이어지는 동안 임금과 소득이 물가 상승을 따라잡지 못해 우리나라 국민이 전보다 가난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임금이나 소득보다 물가가 훨씬 많이 뛰면서 살림살이가 더 팍팍해진 것이다.
7일 통계청에 따르면 작년 우리나라의 소비자물가지수는 111.59로 물가가 본격적으로 오르기 전인 2021년(102.5)보다 8.9% 상승했다. 2년간 물가 상승률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가 포함된 1995~1997년(9.6%) 이후 26년 만의 최고치다.
물가가 치솟았지만 근로자와 자영업자를 망라한 우리나라 가계의 평균 실질소득은 뒷걸음질했다. 우리나라 가계 전체의 월평균 소득(세금 등을 제외하고 실제 쓸 수 있는 돈)은 2021년 378만3306원에서 2023년 404만3832원으로 6.9% 증가하는 데 그쳤다. 물가를 감안하면 실질소득이 2% 감소한 것이다.
물가 상승률이 아무리 높아도 임금과 소득이 그 이상 오른다면 살림살이가 쪼그라들지는 않는다. 미국 경제가 지난해 세계적 인플레이션 충격을 딛고 순항한 것도 임금이 물가 이상으로 올랐기 때문이다. 미 노동부에 따르면 미 근로자들의 명목임금 상승률은 지난해 2월 물가 상승률을 추월하기 시작해 줄곧 높게 유지되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해 미국의 실질임금 상승률은 0.8%를 기록했다.
40대 맞벌이 회사원 이모씨는 요즘 온라인에서 농산물이나 과일을 살 때 ‘못난이’나 ‘흠집’ 같은 키워드를 넣어 검색한다. 과일·채소 값이 너무 올라서 제값 주고 사 먹기엔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씨는 “사과 3kg이 3만원 정도인데 못난이 사과는 5000원 정도 저렴하다”며 “연봉은 1년에 2% 오를까 말까인데 사과 값은 50% 넘게 오르니 장 보는 게 무서울 지경”이라고 말했다.
물가 오름폭이 일해서 벌어들이는 소득의 상승 폭을 웃돌면서 서민들 살림살이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으로 가계부에 구멍이 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엥겔지수(생계비 가운데 음식비가 차지하는 비율)가 높은 저소득층은 농산물 가격 급등으로 고물가 시기에 더 험난한 ‘보릿고개’를 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질임금 증가율, 2년 연속 마이너스
7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실질임금 증가율은 고물가가 덮친 2022년과 작년에는 -0.2%와 -1.1%로 뒷걸음질했다. 실질임금이 2년 연속 줄어든 것은 현재와 같은 통계 기준이 적용된 2012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실질임금 증가율은 코로나 사태 전인 2018년, 2019년 각각 3.7%, 3%를 기록했다. 물가가 오르는 것에 더해 추가로 3% 넘게 임금이 올랐다는 뜻이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 사태로 실질임금이 0.5% 상승하는 데 그치더니 2022년부터 2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이다.
2022년엔 월평균 명목임금이 4.9% 오르면서 5.1%에 달하는 높은 물가 상승률을 어느 정도 방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작년엔 평균 월급이 2.5%밖에 오르지 못했다. 지난해 임금 상승률이 낮았던 이유로는 중국 등의 경기 둔화로 수출 중심의 우리나라 기업들 실적이 크게 부진했던 것이 꼽힌다.
코로나 사태 이후 생겨난 일자리 중 저임금, 임시직 비율이 높다 보니 전체 근로자들의 임금 상승률이 제약받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코로나 사태 이후 제조업 등 견실한 일자리는 거의 안 늘었다”며 “물가 상승에 따른 임금 인상 압력도 정부가 경제 상황을 우려해 억제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실질임금이 줄어 사실상 쓸 돈이 감소하면서 내수 부진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소매 판매 증가율은 2022년(-0.3%)과 작년(-1.4%) 2년 연속으로 감소했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체감 물가는 크게 높아졌는데 임금은 물가를 따라가지 못하다 보니 서민들의 체감 경기가 나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저소득층이 더 험난
더 큰 문제는 저소득층의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소득층은 보통 버는 돈 중 많은 부분을 식자재를 사는 데 쓴다. 그런데 주로 농산물 중심으로 물가가 급등하고 있다 보니 그만큼 타격이 큰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소득 하위 20% 가구의 엥겔지수는 20.3%로 소득 상위 20% 가구(11.8%)의 2배에 가까울 정도로 높았다. 식료품에 많은 돈을 써야 하다 보니 저소득층이 평소 쓸 수 있는 돈은 크게 줄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 분석에 따르면, 코로나 사태 이후(2019년 4분기~2021년 4분기) 식료품비 증가로 쓸 수 있는 돈이 줄어든 비율은 소득 하위 20%가 5.7%로 소득 상위 20%(1.2%)의 4.8배에 달했다.
고물가뿐 아니라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금리 인상이 지속되면서 고금리로 고통받는 서민도 크게 늘고 있다. 물가가 올라서 기본적으로 써야 하는 비용이 급증한 데다 이자를 갚는 데 쓰는 돈도 늘면서 이중고에 짓눌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과 통계청 등에 따르면, 부채가 있는 가구 중 소득 하위 20%의 평균 부채 규모는 2021년 5423만원에서 지난해 6430만원으로 18.6% 늘었다. 이에 따른 원리금 상환액은 같은 기간 494만원에서 632만원으로 27.9%나 증가했다. 반면 소득 상위 20%의 부채 규모는 같은 기간 6.6% 늘고, 원리금 상환액도 4.1% 늘어나는 데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