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가 2년 9개월 만에 배럴당 70달러 아래로 급락했다. 서부텍사스유(WTI)가 배럴당 60달러대로 주저앉은 데 이어 글로벌 유가의 기준인 북해산 브렌트유의 70달러 선이 붕괴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글로벌 공급망 교란으로 2022년 3월 배럴당 120달러를 웃돌았던 국제 유가가 전쟁 전인 2021년 말 수준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미국·중국 등 거대 경제권의 경기 침체 우려가 맞물렸기 때문이다.
◇유가, 2년 9개월 만에 최저
10일 브렌트유는 3.7% 급락한 69.19달러로 장을 마쳤다. 브렌트유 가격이 70달러 선 아래로 내려간 것은 2021년 12월 이후 2년 9개월 만에 처음이다. WTI도 이날 4.3% 떨어진 65.75달러로 급락하며 2021년 12월 초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주저앉았다. 두바이유는 70달러 선을 지켰지만, 브렌트유와 WTI 가격을 시차를 두고 뒤따라가는 특성상 곧 60달러대에 진입할 가능성이 높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지정학적 요인과 미국 허리케인의 석유 관련 시설 급습 가능성 등의 변수도 유가를 받치지 못했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이 석유 공급 우려로 이달 중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80달러를 넘어설 것이란 전망을 담은 보고서를 이날 내놓았지만 시장의 수요 둔화 우려를 잠재우기는 어려웠다.
유가 하락이 투자자들에게 나쁜 소식만은 아니다. 컬럼비아대 글로벌에너지정책센터의 수석 분석가 크리스토프 뤼엘은 “유가 하락은 인플레이션 압력을 덜어줘 특히 중앙은행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지난 7월에 이어 12일 기준금리 추가 인하 여부를 결정할 유럽중앙은행과 18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를 열어 장기간의 긴축을 끝낼 예정인 미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어깨를 가볍게 해줄 수 있다는 뜻이다.
◇중국 경기 둔화가 유가 끌어내려
하지만 유가 하락이 글로벌 경기 침체 신호라면 사정이 다르다. 이날 유가를 끌어내린 것은 중국의 경기 둔화로 글로벌 원유 수요가 둔화할 것이라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전망이었다.
OPEC는 이날 발표한 월간 보고서에서 중국의 성장 둔화 전망 등을 반영해 올해 세계 석유 수요 증가분 전망치를 하루 211만배럴에서 203만배럴로 낮추고, 2025년 수요 증가분 전망치도 하루 178만배럴에서 174만배럴로 내렸다. OPEC은 중국의 올해 원유 수요를 하루 70만배럴 증가에서 65만배럴 증가로 하향해, 중국을 수요 둔화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했다.
중국은 내수 부진에 부동산 과잉 공급으로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고 있다. 생산자물자는 23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악순환에 빠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날 중국의 디플레이션 압력이 고조되면서, 기업 이익은 큰 폭으로 감소했고 이것이 해고와 급여 삭감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중국 경기가 가라앉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고급 술 마오타이다. 11일 상하이증시에서 마오타이 제조사 귀주마오타이의 주가는 1380위안 선을 기록했다. 연초보다 18% 하락했다. 2021년 2월까지만 해도 마오타이의 주가는 장중 2600위안 선을 기록하며, 중국공상은행을 누르고 시가총액 1위 대장주였는데, 그새 반 토막 났다. 중국 경제가 둔화하면서 소비자의 지갑은 얇아지고, 최고급 주류의 수요에 악영향을 끼친 것이다. 블룸버그는 “마오타이 가격이 떨어진다는 것은 중국의 소비 회복이 멀었다는 의미”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유가 하락의 원인으로 지목된 ‘중국 경기 침체’가 연쇄적으로 미국과 유럽 등에도 영향을 끼쳐, 전 세계적인 경제 위축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최근에는 미국의 경기 침체 우려도 시장을 흔들고 있다. 미국의 8월 신규 고용은 14만2000명 늘었지만, 이는 전문가 예상인 16만5000명 증가에 못 미치면서 시장의 걱정이 커지고 있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중국 경제의 디플레이션 악순환이 예상과 달리 더욱 장기화될 경우 중국발 디플레이션 리스크는 글로벌 경제, 특히 한국 경제와 금융시장에 시커먼 먹구름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