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30일 정부세종청사를 찾아 최상목 경제부총리와 타운홀 미팅을 했다. 연초 최 부총리가 한은을 방문한 답방 성격이라지만, 한은 총재가 기획재정부를 찾은 것은 정부 수립 후 처음이라 주목받았다. 금리 결정을 위한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오는 11일로 예정돼 있어 금융시장 관심도 쏠렸다. 하지만 이 총재는 이날 금리가 아닌 교육 등 구조 개혁 큰 그림에 집중했다.
이 총재는 이날 “세계 어디를 다녀도 대학들이 다양성을 위해 (신입생을) 뽑는데, 한국은 성적순으로 뽑는 게 가장 공정하다고 생각하면서 거기에 빠져 있다”며 “성적순으로 뽑는 것이 가장 공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8월 말 한은이 보고서로 제언한 ‘상위권 대학 지역 비례 선발제’를 옹호한 것이다. 서울권 주요 대학이 자발적으로 지역별 학령인구 비율을 반영해 신입생을 안배해야 한다는 것으로, 그래야 사교육 과열과 수도권 인구 집중, 집값 상승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논란 부르는 의제 거듭 제기
지역 비례 선발 아이디어는 발표 직후부터 논란이었다. 강남 등 서울을 지방에 비해 역차별하는 것이고, 학생 기본권을 제한해 위헌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 총재가 공개된 자리에서 지역 비례 선발제의 중요성을 주장한 것은 두 달 새 세 번째다. 지난달 24일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세계 지도자들이 한국 교육 시스템에 찬사를 보내지만, 그 실상을 알지 못한다. 이 치열한 경쟁은 경제를 해치고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며 “(사람들이) 서울을 떠나도록 하는 것을 포함한 ‘과감한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교육뿐 아니다. 올 들어 이 총재는 사회적으로 논란이 될 만한 사안을 한은 보고서 형식을 통해 적극 제기하고 있다. 3월엔 돌봄 비용을 낮춰야 고령화·저출산이라는 한국의 고질병을 해결할 수 있으며 “돌봄 서비스에 최저임금을 다소 낮게 적용하면 효율성을 개선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최저임금 차등화에 반대하는 양대 노총이 한은 앞에서 규탄 시위를 하는 초유의 일로 이어졌다.
6월엔 ‘농산물 물가’를 저격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농산물 물가가 유독 높다며 수입 확대를 제안한 것이다. 이 총재는 “사과처럼 전혀 수입하지 않으면 농가 보호에는 좋은 정책일지 모르지만,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이례적으로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등판해 “(한은은) 농업 분야 전문가가 아니다. 수입을 많이 한다고 해서 가격이 떨어진다는 것은 큰 연관성은 없다”고 반박했다.
◇면모 일신인가, 넓은 오지랖인가
도발적인 한은 총재의 모습은 낯설다. 그간 한은은 극도로 몸을 사려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 기간 절간에 비유됐던 ‘한은사(寺)’의 면모를 이 총재가 일신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석병훈 이화여대 교수는 “미국은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뿐 아니라 각 지역 연방준비은행들도 경제학자의 시각이 담긴 여러 사회적 주제에 대한 보고서를 내놓고 있다”고 했다.
한국 경제의 규모가 커진 만큼 더 이상 통화·재정 정책만으로는 운영할 수 없고 경제 구조 자체를 손봐야 하는데, 이 총재가 앞장서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한은 관계자는 “이 총재가 ‘한국 경제가 10년 뒤에 더 치열하게 할 수밖에 없는 고민을 미리 해둬야 한다’는 마음으로 나무 심는 것처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이 총재가 이날 타운홀 미팅에서 우군을 얻었다는 말도 나온다. 최상목 부총리는 한국 경제를 타이태닉호에 비유하며 “암초를 발견하면 이미 늦고, 발견하기 전에 항로를 바꿔야 한다”며 이 총재를 옹호했다. 그는 이어 “자동차가 네 바퀴가 있으면, 앞바퀴는 일을 저지르고 뒷바퀴는 수습을 하는 것”이라며 “이 총재가 공론화해서 앞바퀴 역할을 해주면, 정부는 뒷바퀴 역할로 주워 담아 일을 수습해 가는 역할”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은 안팎의 우려도 적지 않다. 전직 한은 관계자는 “중앙은행은 물가 안정이라는 법에 정해진 책임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관련 연구에 깊지 않은 한은이 오지랖 넓다는 공격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이 총재 임기가 1년 반 정도 남았으니, 정치권 진출이나 부총리 같은 다음 행보를 준비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 어쩔 수 없이 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