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기업의 합병·분할 시 이사회가 주주의 이익 보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이 명시된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마련해 이번 주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기업이 물적분할(모회사가 신설 회사의 지분을 100% 소유)한 자회사를 상장할 때 공모 주식의 최대 20%를 모회사 주주에게 배정하는 내용도 법안에 담긴다.
정부는 그동안 소액주주 보호를 위해 상법 개정과 자본시장법 개정을 검토해왔는데 자본시장법 개정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자본시장법은 국내 증시에 상장된 2600여 개 상장 법인에 적용되는 반면, 상법은 상장이나 비상장과 무관하게 102만여 모든 법인에 적용된다. “상법을 개정해 모든 기업이 대상이 되면 큰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는 경영계의 우려를 받아들인 것이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2일 ‘일반주주 이익 보호 강화를 위한 자본시장법 개정방향’ 브리핑에서 “적용 대상 법인을 상장 법인으로 한정해 중소·중견기업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액주주 울리는 인수합병 불가능해진다
이날 금융위가 공개한 자본시장법 개정 방향에 따르면 상장법인이 합병·분할 등 중요한 결정을 할 경우 주주의 정당한 이익이 보호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이 명시된다. 이사회는 주식을 교환·이전하거나 분할할 때는 목적이나 기대 효과, 가액의 적정성 등에 대한 의견서를 작성해 공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개정안은 기업 합병·분할로 피해를 본 주식 투자자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마련됐다. 가령 올해 7월 두산그룹은 연간 1조3000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는 알짜 기업 두산밥캣을 모기업인 두산에너빌리티에서 떼어내 두산로보틱스와 합병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그런데 두산로보틱스는 지난해 적자 192억원을 기록한 회사이기 때문에 밥캣과 에너빌리티 주주들은 “합병안 발표 이후 회사 가치가 떨어지고 주가 하락으로 피해를 봤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합병이나 분할을 할 경우 주주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 조항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전격적인 합병이나 분할로 인한 주주들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계열사 간 합병 등에 적용되는 기업 가치 산정 기준도 바뀐다. 지금은 합병 시점의 주가로 합병하는 기업의 가치가 결정된다. 기업들이 피합병 기업의 주가가 낮을 때 합병하면 상대적으로 싼값에 인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합병하는 기업은 큰 이익을 보는 반면, 합병당하는 기업 주주는 큰 피해를 본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두산밥캣의 인수·합병 과정에서도 두산그룹이 상대적으로 주가가 저평가된 밥캣을 합병해 이익을 보려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정부는 앞으로 주가가 아니라 자산·수익가치 등 다양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공정한 가액으로 합병 기준을 결정하도록 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또 주주들이 보다 정확한 정보를 받을 수 있도록 합병 등을 추진할 때 외부 평가기관에 의한 평가가 의무화되고, 결과도 공시해야 한다. 또 쪼개기 상장에 따른 피해를 막기 위해 물적분할 후 자회사를 상장하는 경우 대주주를 제외한 모회사 일반주주에게 공모주의 최대 20%를 우선 배정하는 근거도 마련하기로 했다.
◇정부 “상장 기업만 적용해도 주주 보호 충분”
한국경영자총협회, 대한상공회의소 등 8개 경제 단체는 공동성명을 내고 “정부 개정안은 주주 이익 보호를 위한 장치를 도입해 일반주주 권익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경제인협회 유정주 기업제도팀장은 “야당이 추진하는 상법개정안은 대기업 죽이기 법안이었는데, 정부가 내놓은 방안은 꼭 필요한 제도를 핀셋으로 개선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주주를 보호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약해졌다는 반론도 나온다. 이남우 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주주 보호는 상법을 개정하는 게 정통 방식이며, 연초부터 윤석열 대통령과 금융 당국 관계자들이 상법 개정의 의지를 보였는데, 결국 기업의 반발에 접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일반주주 보호 문제는 재무적 거래에서 주로 발생하기 때문에 자본시장법에 재무적 거래에 대한 주주 보호 노력 조항을 둠으로써, 상법 개정으로 우려되는 부작용을 해소하고 실효적인 주주 보호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두산밥캣 인수합병 사건
지난 7월, 두산그룹은 굴착기 등을 제작하는 두산밥캣을 모기업 두산에너빌리티에서 떼어내 두산로보틱스 자회사로 편입하는 지배구조 개편안을 발표했다. 밥캣은 연간 영업이익이 1조3000억원에 달하고 로보틱스는 192억원의 적자 기업인데도, 합병 비율은 밥캣 주식 1주당 로보틱스 주식 0.63주에 불과했다. 5만원을 넘던 밥캣 주가가 3만4000원 선까지 떨어졌고, 밥캣 주주들이 반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