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비상계엄과 탄핵 충격으로 원화 환율이 달러당 1500원 선을 위협하며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 그런데 원화보다 가치가 더 떨어진 통화가 있다. 바로 일본 엔화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작년 12월 기준 일본의 실질실효환율은 71.31로 비교 대상국인 64국 가운데 가장 낮다.
실질실효환율은 무역 상대국의 물가 상승률까지 고려한 환율로 한 나라의 화폐가 상대국 화폐보다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의 구매력을 가졌는지를 나타낸다. 이 수치가 100을 넘으면 고평가, 100보다 낮으면 저평가돼 있다는 의미다. 한국의 계엄사태 직전 945원이었던 100엔당 원화 환율이 최근 938원으로 도리어 내려갔을 정도(엔화 약세)다.
일본은행이 엔화 가치를 떠받치려고 지난해 3월부터 -0.1%던 기준 금리를 세 차례 올렸지만 역부족이다. 지난달 24일 일본은행이 0.5%로 금리를 올렸지만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30년 내 최저 수준이다.
◇저금리, 무역수지 적자가 큰 몫
일단 엔화 약세는 미 달러 강세 탓이 크다. 일본은행이 -0.1%에서 0.5%로 금리를 올리는 동안 미국 기준 금리(상단 기준)는 5.5%에서 4.5%로 떨어졌다. 하지만 달러 선호도는 더욱 커졌다. 주요 통화 6개에 대한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그 사이 100에서 110까지 육박했다. 김찬희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은 “단기적으로 미국 달러 강세가 지속되면서 엔화 가치가 오를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고 했다.
낮은 금리로 엔화를 빌려 다른 국가의 자산, 특히 위험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도 엔화 약세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작년 9월 한국은행이 추정한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은 506조6000억엔(약 4660조원)에 달한다. 로이터통신은 “엔화는 달러, 유로 등 주요 10국(G10) 통화 중 수익률(금리)이 가장 낮다 보니 전 세계 투자자들이 엔화를 싼값에 빌리고 있다. 엔화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일본의 무역 적자도 엔저에 큰 몫을 담당했다. 지난해 일본은 5조3326억엔(약 49조원) 무역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 2011년 30년 만에 무역 적자를 기록했던 것이 전통의 수출 대국 일본에서는 빅뉴스였는데, 최근에는 4년 연속 무역 수지 적자 행진이다. 엔고였던 시절 해외로 빠져나간 일본 대기업들로 인한 제조업 공동화, 고령화로 인한 산업 기반 약화 등 때문이다.
아베노믹스(초저금리를 기반으로 하는 아베 전 총리의 경제정책)와 완전히 결별해야 엔화 가치가 다시 오를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지평 한국외대 특임강의교수는 “아베노믹스 때문에 일본 금리가 마이너스를 고수했고, 양적 완화를 통해 돈을 무제한으로 풀면서 일본 엔화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며 “아베노믹스 여파가 완전히 사라져야 엔화가 근본적으로 정상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소득, 한국·대만에 뒤져
엔저는 일본인의 생활을 갉아먹는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해 10월 추정한 일본의 작년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3만2859달러다. 한국(3만6132달러)이나 대만(3만3234달러)에 뒤진다. 일본의 1인당 GDP는 2012년 4만9145달러에 달했는데, 12년 만에 달러로 환산해 3분의 2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2012년에는 달러당 평균 80엔이었던 엔화 환율이, 작년에는 152엔 수준이었기 때문에 달러로 표시되는 1인당 소득이 확 낮아질 수밖에 없다.
낮은 환율 덕에 수출 대기업의 주가는 올라 닛케이평균이 1990년 버블 시대를 넘어섰다지만, 일본 내 중소기업과 서민들은 수입 물가 상승에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이다. 지난해 “(외국산) 오렌지주스조차 못 살 정도가 되어 (일본산) 감귤 혼합 주스를 울면서 마시게 됐다. 관광업으로 동남아시아, 인도, 그리고 이름조차 모르는 나라 사람들에게 필사적으로 머리를 숙여 외화를 벌고 있다”며 일본 경제 상황에 탄식한 ‘2024년의 일본’이라는 제목의 인터넷 글이 일본 내에서 선풍적인 관심을 끈 이유다. 김규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환율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나라 경제가 어떻게 되는지를 일본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했다.